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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우 Feb 26. 2023

은행원이어서 행복하셨나요?

수필

은행원이어서 행복하셨나요?

 

   제가 태어난 곳은 김생산지로 유명한 섬이다. 어릴 때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마을에 축하 플래카드가 걸린 것처럼, 그 당시에는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합격하면 플래카드가 붙었었고, 그 선배들이 부러웠었고 나도 은행에 들어가야지 하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중학교 진학을 상고와 한 울타리에 있는 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중학교 3년 동안 상고 형님들이 학교 정문 쪽에 도서관이 있는 건물에서 숙식을 하면서 은행합격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았고, 자취하는 옆집 형이 토요일 일요일이면 꼼짝도 않고 공부만 하다 화장실 갈 때만 마당에 나오는 것을 본 적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냥 아무런 고민 없이 상고에 진학했고, 상고에서 은행 합격을 목표로 학교 수업은 물론 주산, 부기, 영어, 상식 공부를 열심히 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상위권에 들어야 은행 입사 원서를 쓸 수 있고, 은행에 합격하면 고생 끝이라는 생각으로 배가 고파도, 몸이 아파도 공부만 했었다. 공부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기력이 쇠해진 내 몸은 영양 부족에 결핵까지 갖게 된 것이다. 두 번의 은행의 필기시험 합격에도 똑 같이 신체검사에 불합격 판정을 받은 19살, 20살의 인생은 참으로 안 풀리는 인생이라는 생각이었고,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었다. 그래도 회사에 취직하여 살아갈 방법을 찾은 것은 부모님을 대신한 형제들 덕분이었다. 군대를 마치고 다시 회사를 다니면서 나의 자존심을 찾기 위해서는 꼭 은행에 들어가야겠다는 열망 덕분인지 군필자로 25살에 은행에 입사하게 되었다.


   은행에 들어가니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들어간 동기들과는 호봉차이가 많이 나고 있었다. 대리 자격시험도 늦게 치고, 대리 진급시험도 늦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보다는 나는 숫자감각이 남보다 부족하다는 것을 처음 느꼈고, 사교성이 부족해 항상 뒷전에 있게 되었고, 고향도 부산이 아니고, 학교 선배도 많지 않아서 이끌어 주는 사람도 없어서 동료들이나 선임들에게 치이는 편이었다. 그런 데다가 나의 상급관리자인 대리분이 다른 동료들에게 보다 나에게는 화도 잘 내고, 나무라기도 많이 해서 은행 가기가 싫어서 무단결근을 많이 했었다. 그만큼 나는 일도 잘 못하고, 은행에 적성이 안 맞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당시 그 지점에는 은행에서 엘리트에 해당하는 훌륭한 다른 대리님들이 세 분정도 있었는데, 오히려 그분들이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셔서 큰 힘이 되었고 당시에 지점장 하신 분들이 힘들어하는 나를 잘 보살펴 주셨다. 그 덕분에 다음 해에는 신임을 얻어 대부계에서 일을 배우게 되고 그 이후로 가는 지점마다 대부계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대부계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당시에는 은행에서 일반인들이 대출받기 어려운 시절이어서 아는 사람이 있거나 해야 대출을 받을 수가 있었다. 손님이 오면 담배를 권해야 하는데 담배도 피우지 않았고, 저녁에 접대를 받아야 되는데 술도 못 마셨다. 폐결핵을 앓은 이후로 건강상 두 가지 다 안 했는데, 억지도 먹어봐도 밤새 토하고, 다음날도 견딜 수가 없을 만큼 불편했다. 그런 생활 속에 또 은행이 가기 싫어서 무단결근을 많이 하기도 했다. 그래도 좋으신 선배들이 나를 감쌌고, 잘 챙겨줬다. 나처럼 적성이 맞지 않아서 그렇게 어렵게 들어온 은행을 그만두는 후배들을 많이 보았지만, 나는 회사에도 근무했었고, 여기보다 더 좋은 직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기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대리시험에는 한 방에 붙겠다는 생각, 내부 문서는 집에 가져가서라도 읽고, 내부규정은 그 누구보다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가정을 꾸리고 아버지가 되고 나서였던 것 같다.  대리 시험은 두 번 만에 합격했고, 대리 시험합격하고 나서, 나도 술을 좀 마셔야겠단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책임자가 돼서 인정받으려면 그래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술을 배웠고, 스트레스받으면 술로 해소하려고 하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남들보다 두 번 세 번 여러 번 해야 하는 노력을 했다. 은행에서 혼자서 잘할 수 있는 것은 공부뿐이었다. 은행 구조조정이 있을 때마다 내 동기들 중에 본인의사와 관계없이 은행은 그만두는 경우를 보았고, 금융 자격증을 다른 직원들보다 몇 년 앞서서 따기도 했다. 그리고 야간 대학과 대학원도 다녔다. 이처럼 늘 뒤처지지 않으려고 한 발 앞서가려는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앞만 보고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서도 늘 불안했고 불안정한 마음상태로 거의 33년을 보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나의 은행생활은 나 자신을 힘들게 해야만 하는 삶이었다.


  퇴직 후 중학교에 경제교육을 하면서 진로교육도 할 때는 내 사례를 말해주면서 진로선택은 나 자신과 그 직업에 대해 잘 알고 선택해야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하면 친구들이 공감하는 분위기다. 직업선택이 자신의 생각대로 잘 된다는 보장이 없지만 처음부터 진로를 결정할 때 이것을 잘 알고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은행원으로 행복했냐고 물으면 행복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감사한 마음이다. 처음에 적응을 잘 못 해서 많이 힘들었을 때 잘 챙겨주신 대리님들, 지점장님, 친하게 지냈던 동료 분들이 아니었으면 은행을 그만두었을 것이고, 무단결근을 3일씩이나 해도 그것을 알고도 다른 이유를 들어서 나를 보호해 주셨던, 나를 믿고 인정해 주셨던 선배님들 상사 분들께 정말 감사한 마음이다. 그 이후에도 부족한 나를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좋다면서 잘 따라주고 인정해 준 많은 후배님들께도 감사한 마음이다. 특히 내가 공부한다고 자리를 비울 때 내 까지 대신 일을 많이 해 주셨던 동료 분, 후배님들께도 감사한 마음이다. 그 덕분에 지금은 내가 하고 싶었던 강사로 활동 열심히 하면서 봉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서 은행 근무하는 동안 제게 신뢰를 주시고 자신의 자산을 맡겼던 고마운 그 많은 고객분들 덕분에 별 탈 없이 사고 없이 33년 동안 은행에 잘 근무할 수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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