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내 재능을 키워주는 텃밭이었다
여름 어느 날 문득 이 친구가 생각나 오랜만에 카톡으로 안부를 물었다. 그 친구는 우리나라 굴지의 건설사의 칠레의 프렌트 공사 현장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카톡을 보낸 즉시 카톡 영상통화 전화가 울렸다. 이 친구와 영상통화를 하면서 자기가 해외 프랜트 사업장에서 20년 넘게 일하면서 메모했던 글을 모아 책을 내게 되었다고 했다. 상무로서 후배 직원들에게 좋은 자료로 남겨 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편집을 좀 봐달라면서 메일을 보내 왔다. 꼼꼼하고 자상하고 따뜻한 휴머니즘으로 현장소장의 지혜롭고 아름다운 리더의 모습을 발견하고 느끼면서 감사한 마음과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 회사와 직업관련 지인들이 추천사를 읽으면서 나의 추천사도 올려 주면 좋겠다고 했더니, 무조건 찬성이란다. 너만큼 나를 오래 알아온 사람은 또 없다면서. 그리고 며칠 전 그 책이 우리 집에 도착했다. 이 친구는 전기과 출신이고 나는 상업계고 출신이라 일하는 분야가 틀려서 기술적인 문제는 어려웠지만, 또 글 솜씨는 나보다 투박했지만 그 안에 근본적인 인간됨은 어릴 때 그 친구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 친구와 나는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고향친구다. 각자의 가정 사정에 따라 나는 육지로 중학교를 가게 되고, 이 친구는 고향에 있는 중학교가 진학하게 되었다. 중학교를 진학하기 위해 우리는 방과 후에 담임선생님 지도하에 다른 친구들과 집에 가지 않고 학교에서 잠을 자면서 진학 과외수업을 함께 했던 친구다. 각자 다른 중학교를 다니면서 우리는 방학이면 만나곤 했지만, 그 외에 떨어져 있는 시간에는 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근황과 생각들, 미래의 꿈, 여자 친구 얘기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14살에서 19살 사이의 6년의 시간들을 편지로 소식을 나누다가 방학이면 만나기를 거듭한 가운데 우리는 좋아하고 멀어지고 하는 부침 속에서도 60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때의 정서로 지내고 있다.
그 때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동네 형들이랑, 다른 친구들이랑, 형제들이랑 자취생활을 하면서도 많이 외로웠던 나는 유일하게 이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에 목숨 걸고 살았던 것 같다. 방학 때는 낮에는 집안일을 거들다 저녁이면 날마다 만나는 재미로 그 외롭던 유년의 시절을 보낸 것 같다. 그 친구와 주고받았던 글들이 오래된 앨범에 정리되어 있기도 하다. 이 친구를 시작으로 나는 사귀는 친구들에게 많은 편지를 쓰면서 우정을 키워왔다. 글은 나의 우정을 확고하게 만들어준 시멘트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편지 글로 돈독해진 우정은 오래갔다. 결국 나는 글 쓰는 재주를 가지게 되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순수함에 대한 고백이고 내 인생도 그렇게 살았다고 본다.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은 그 친구를 사랑하는 시간이었지만, 그 이전에 보잘것없다고 느껴지는 내 존재를 확인하려 몸부림쳤던 시간이고, 어디서부터 온지 모르는 외로움을 이겨내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친구의 답장을 기다리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으며, 친구의 편지를 받아 든 순간이 가장 행복했고, 내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익숙해진 습관처럼 나는 늘 편지를 쓰고 낙서를 하고, 힘들고 외롭고 괴로우면 글을 쓰는 시간으로 위로 받았고, 차츰 다른 사람이 쓴 글 속에서 위로를 받기 했다. 다른 사람이 쓴 시집을 읽게 되고, 나도 비로소 시인이 되었다.
첫 시집의 서문에서 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이 친구에게도 이야기 하게 되었다. 유명한 시인은 아니지만 인터넷에서 내 시를 가져가서 자신의 카페나 블로그를 꾸미는 사람들도 있고, 나를 유명한 시인들과 견주어 이야기 해 주는 독자들도 있다. 어쨌든 친구는 내 재능을 키운 텃밭이라고 생각한다. 고향 집에는 대부분 텃밭이 있다. 텃밭에는 어머님이 철 따라 여러 가지 작물을 키워서 우리들의 마음과 양식을 풍성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친구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 주지만, 나의 재능을 꽃피우기 해준 토양이기도 했다. 지금의 나는 그 친구와 함께 했던 시간들로 이루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