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 끌리다
학부 때 교양과목 중 '문화사' 과목이 있었습니다. 미적분에 구조역학, 재료공학에 익숙한 공대생이었던 터라 인문학강의를 듣는다는 것이 생소하긴 했지만 나름 재밌겠다 하는 심정으로 수업을 들었습니다. 1회 강의시간이 3시간 연속강의였고, 당시 교수님은 녹음기를 틀어놓듯 쉬지 않고 강의를 이어갑니다. 숨이 막힐 정도였습니다. 역사, 문화, 동양, 서양, 신화, 철학, 전쟁을 넘나들면서 강의가 끝날 즈음에는 그 큰 칠판이 백색의 글씨로 가득했습니다. 그 박식함과 탁월한 메가톤급 암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과 쪽 사람들은 이 정도로 공부하는구나~! '
학점제한 때문에 서양건축사와 한국건축사를 한꺼번에 신청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공수업 마지막 학기다 보니 이번에 못 들으면 한 과목은 졸업할 때까지 영영 못 듣게 됩니다. 서양건축사를 신청하자니 한국건축사가 눈에 아른거리고, 한국건축사를 신청하자니 서양건축사가 그렇고 해서 일단 중대한 결심을 했습니다. '서양건축사를 신청하고, 한국건축사는 교수님께 사전양해를 얻어 청강을 하자!' 결국 저는 두 과목 모두를 듣게 되었고, 한국건축사는 성적에 반영되지 않았지만 중간고사, 기말고사까지 응시를 했으니 교수님이 예뻐라 했을 것 같습니다.
고대 이집트건축부터 그리스-로마건축, 르네상스건축, 초기그리스도교건축 등 서양건축사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우리나라의 궁궐건축, 가람건축 등 전통 건축양식을 공부하니 등록금이 아깝지 않습니다. 건축사는 시대별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라 그 배경지식으로 역사공부는 필수적입니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기둥양식(Order)을 묘사(描寫)도 하고, 한옥의 공포(栱包)와 가구도(架構圖)를 익혀가는 재미가 꽤 괜찮습니다. 근대건축과 현대건축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건축이론을 이해하려면 철학(哲學)까지 손을 대야할 판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이해 못 해도 핵폭탄은 터지듯이 제가 철학을 몰라도 예술은 탄생되는 거니까요? ㅎㅎ 어쭙잖은 지식을 들키지 않으려면 가급적 ‘엔지니어’라는 정체성을 고집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십 년 동안 건축설계와 디자인 그리고 엔지니어로 업(業)을 이어가면서 틈틈이 읽고 관심을 가졌던 책들이 대부분 역사와 인문학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인지하게 됐습니다. 특히 역사는 그 수많은 이야기를 내 머릿속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야속합니다.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에서 SSD까지 저장 장치는 크기가 줄면서 용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제 머리는 역으로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가 되고 있으니 참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애초부터 그 용량이 맞습니다.ㅠㅠ 책은 역사, 에세이, 인문학을 좋아하고, 영화는 휴먼드라마 또는 초현실적인 공상과학(말도 안 되는 스토리 제외)을 좋아합니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역사물도 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가깝게 지내는 지인 중에 국문학을 전공하시고 역사에 해박하신 분이 계셔서 함께 차를 마시며 그분의 이야기 듣기를 좋아합니다. 기회 되면 "역사문학 동호회 한번 하시죠?"하고 제안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브런치작가가 되기 전까지는 제가 글쓰기를 좋아하는지 몰랐습니다. 특별한 경우에 어떤 주제를 갖고 글을 쓰긴 했어도 틈이 날 때마다 써본 적은 없으니까요. 일주일에 몇 편씩 글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 내심 놀라운 일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적지않게 살았건만 아직도 나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심리학을 기반으로 한 건축에도 관심이 많은 것 또한 인문학을 좋아하는데서 출발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책을 좋아하는데 책을 읽지는 않습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입니다. 사실 '인문학을 좋아하는데 인문학을 잘 모릅니다.' ㅎㅎ
이제 관심을 좀 가져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