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축물 관리 유감
시험에 최적화된(?) 어느 학원 강사의 말이 떠 오릅니다. "여러분! 시험은 출제자와 수험자 간의 '교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시험 출제자의 의도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에는 공감하지만, 그런 교감이 있으려면 강사정도의 실력은 돼야 가능하지 않을까요? 마치 실력이 비등비등해야 상대방의 수를 읽고, 방어와 공격이 되는 수싸움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예전에 남녀 간의 관계를 '썸'과 '쌈'이라는 간단한 단어로 해학적 코믹을 만들었던 개그프로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썸'을 타기 위해서는 둘만이 알 수 있는 어떤 '교감'이 있어야 합니다. 스쳐 지나가는 작은 손짓, 대화 속에 숨어있는 미묘한 뉘앙스의 단어들,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하는 것 같은데 뭔가 다르게 느껴지는 느낌 아닌 느낌들이 모여 '썸'을 만들게 됩니다. 당연히 전혀 교감이 안되면 '쌈'이 되겠지만...... ㅎㅎ
공사현장이 결정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그 지역을 검색합니다. 근처에 문화유적지나 문화시설이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서원이나 향교, 박물관 등이 있으면 더 좋습니다. 충주 중앙탑사적공원, 김포 장릉(원종과 인헌왕 무덤), 충무로 한옥마을,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수원 행궁, 노량진동 사육신공원, 남산 예장공원(우당 이회영 전시관), 수유동 4.19 민주묘역, 여주 대로사(우암 송시열의 사당) 등 잠시 짬이 날 때마다 들렸던 곳입니다. 복잡한 일을 뒤로 한채 황톳빛 마당길을 밟으면 마음이 한결 안정이 됩니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햇살이 마당과 처마와 툇마루를 만지는 모습이 좋습니다.
홍난파 생가 울타리에 심긴 봉선화꽃이 아름답습니다. 간신히 숨만 쉬고 유물로 살아가는 이끼 낀 섬돌이 애틋합니다. 그랭이질로 주춧돌 위에 서 있는 둔탁함이 포근합니다. 흥선대원군의 사가(私家) 운현궁의 솟을대문이 풍요롭게 보입니다. 학창 시절 여학생 다리를 보면서 엔타시스(entasis ; 기둥의 배흘림)가 심하다고 장난치던 기억도 납니다. ^^
간혹 고궁이나 위에서 말한 문화유적지를 방문하다 보면 전혀 교감할 수 없는 장식물이 보입니다. 안내판, 휴지통, 경사로, 장애인 편의시설, 화장실, 음수대, cctv 등 문화재 관리를 위해 설치된 것들이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것이 아닙니다. 한옥 대문의 턱을 없애기 위해 체크무늬 철판으로 경사로를 만들어 놓고, 난간과 휴지통은 스테인리스로, 안내표지판은 아크릴판에 원색 글씨로, 음수대는 은빛의 수도꼭지에 파란색 플라스틱 바가지며 도무지 어울릴 수 없는 조합에 답답함이 느껴집니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유명한 문화시설은 그래도 구석구석 신경 쓴 흔적이 보입니다. '아~ 이렇게 하느라 고민 많이 했겠네!', '오! 이거 좋은 생각인데?', '야~ 이걸 직접 주문 제작한 것 같은데 건물과 잘 어울린다. 예쁘다!' 하는 감탄이 나옵니다. 글쓰기 큰 제목만 보면 과거와 현재의 만남이나 역사와 문화를 말하는 수준 높은(?) 교감(交感)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니고! ㅎㅎ 관리공무원과 관광객의 교감! 그것을 말하는 것이죠. (살짝 실망 ㅋㅋ)
비단 문화재뿐만 아니라 모든 건축물은 '만든 사람'과 '보는 사람' 사이에 교감이 생깁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과 정성이 느껴지게 됩니다. 장인(匠人)의 '한 땀 한 땀'의 수고가 명품(名品)이 되는 것처럼, 명품은 장인과 사용자의 교감으로 행복해지는 것이죠.
저는 문화재를 관리하고 시설을 유지하는 공무원과 '썸'을 좀 타 보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