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함
어린 시절, 상품 마진(Margin)에 대한 개념이 조금 생길 무렵에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엄마! 가게 아주머니는 비싼 걸 팔든, 싼 걸 팔든 같은 거네?"
"비싼 걸 팔아야 좋지!"
"그게 아니라 비싼 거나 싼 거나 팔아서 생기는 돈은 같은 거 아냐?"
"야! 그게 어떻게 똑같아! 비싼 거 팔아야 더 좋은 거지!!"
상품의 가격에 마진이 적용되는 것 외에도 매입과 매출, 자금의 회전과 운용 등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면 가게 주인 입장에서는 '비싼 거 팔아야' 좋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질문의 의도는 '이윤'에 있었지만, 당시 이해를 못 하는 아들 앞에서 어이없어했던 천국에 계신 엄마! 지금은 이해하고 있습니다.ㅎㅎ
전체를 보지 못하면 사건을 파악하기 정말 어렵습니다. 하나의 사건은 다양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고,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됩니다. 조선시대 '황희정승'처럼 '네 말도 맞다', 듣고 보니 '당신 말도 맞는구려'하는 양시론(兩是論)적 태도가 불편해 보이긴 해도 한쪽 편에서 전체를 올바른 시각으로 볼 수 없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원전(原典) 뒤에 숨어있는 외전(外傳)이 어떤 의미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확대경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원전(原典)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고 숨어있던 '뒷이야기'를 통해 상황을 보다 넓게 해석해 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죠. 심지어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번외편(番外篇)조차 진실을 이해하는데 효과적이겠다는 생각까지 하면 억측일까요?
인간관계속에서 이해관계가 충돌되기 시작하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미궁(迷宮)에 빠지는 일이 많습니다. 원칙을 찾아내고, 기준을 검색하고, 법률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논리적 접근으로 상대를 제압하려고 합니다. 결국 법관에 의해 '승패'가 나누어질지라도 남는 것은 상처요 허울뿐인 '승소'라는 글자만 남게 되겠지요. 그래서 '법대로' 가기 전에 갈등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노력이 선행되어야 마침내 서로 자기 자리에서 윈윈(win-win)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저는 안된다고 봅니다. 내 자리에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습니다. 사자성어 '역지사지(易地思之)'없이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할 것입니다. 그것 역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수는 있어도 바뀐 상태 없이 이해의 폭을 얼마나 넓힐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원만한 합의를 위해 이해된 것처럼 꾸밀 수는 있겠지요. 그래도 그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입니다. 그렇기에 '뒷 이야기'와 곁가지에서 흘러나오는 '후문'이 오히려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통로 역할도 하게 됩니다. 외전이 아니라면 번외편이라도 참고해서 상황을 보다 입체적으로 보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흉을 보다가도 우연한 기회에 '뒷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의 행동이 이해되는 경우도 많고, 시간이 흐른 뒤 들려오는 이야기를 통해 '아뿔싸 그때 내가 경솔했구나!' 하면서 반성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은 헌법과 법률로 구성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법은 '말씀'과 '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원전(原典)이라면 양심은 외전(外傳)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번외로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부여한 독특한 삶의 여정과 간섭은 모든 사람에게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며 특별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되 진실함이 없다면 양심이 고발을 합니다. 외전이 그 행동에 경종을 울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거리낌이 있거나 불편함이 있다면 '말씀'과 '양심'에 비추어 바로 서려는 노력이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의 삶이 이해되지 않을 때, 말씀과 양심으로 지렛대를 삼고, 하나님이 특별히 주목하고 이끌어가시는 나만의 '번외편'을 들여다보면서 조금이라도 더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삶으로 만들어가고 싶은 맘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브리서 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