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일기장』과 청양 답사 후기
'2025 서울 국제 도서전'에서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의 『다산의 일기장』이 '한국에서 가장 지혜로운 책'에 선정되었다. 『다산의 일기장』은 다산 정약용이 금정역 찰방으로 근무하며 쓴 『금정일록』을 번역하고, 일기의 행간을 분석한 책이다.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가지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의 배경이 되는 '금정역'과 '구봉산' 일원이 어릴 적 추억이 있는 고향이기 때문이다. '금정역'은, 정약용 당시 홍주목(지금의 홍성)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청양군 화성면에 있다.
최근 나는 집안에서 내려오던 『창선감의록』을 연구하면서, 조선 후기 내포지역의 '근기 남인'들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자연스럽게, 어릴 적에 수없이 오르내리던 구봉산 자락이 채제공 선생의 생가터였고, 또한 넘어다닌 고개 아래가 금정역 터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아래 그림의 빨간 원 안에 금정역이 있다. 그리고 오른쪽 청양과 금정역 사이에 구봉산이 있다.
그래서, 이번 오서산에서 열리는 최열 선생의 『이중섭 평전』 독서 강연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정약용과 채제공의 흔적이 있는 두어 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고향집을 방문하는 나의 마음은, 한참 먼저 그곳으로 가 있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다산 정약용이 찰방으로 근무했던 금정역 터였다. 지금 이곳은 몇 개의 사적비만 몇 개 놓여있다.
다산은 이곳에서 약 다섯 달을 머물렀고, 그동안 『금정일록』이라는 일기를 남겼다. 당시 정약용은 주문모 신부 사건에 연루되어 '서학삼흉'으로 지목되어 정치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정조는 그러한 위기의 정약용을 찰방이라는 관직을 맡겨 금정역으로 내려보냈다. 태풍의 한가운데에서 벗어나 스스로 해명할 시간과 함께, 유학에 충실한 자신의 신하임을 입증할 기회를 준 것이다. 정약용이 정 3품 동부승지에서 시골의 찰방으로 좌천된 배경에는 그러한 정조와 번암 채제공의 배려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민 교수의 『다산의 일기장』을 보면 다산은 실제로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켰던 당사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산은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 아니라 실제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신앙적으로도 수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금정일록』에 나오는 정약용은 천주교 지도자였던 김복성이나 이존창을 검거하고, 천주교에 비판적인 성호 이익의 책을 정리하며 '서암강학회'를 열기도 했지만, 내면에서는 수많은 번민과 갈등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정조의 기대와 노론의 감시, 그리고 자신의 양심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 했다는 것이다.
정민 교수는 이 일기장을 다산의 다른 기록들과 정밀하게 비교해, 그의 말과 침묵 속에 담긴 이면을 치열하게 분석하고 있다.『금정일록』은 단순한 관청 일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다산의 젊은 시절, 그의 사상과 정치적 고민, 인간적인 고뇌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귀한 기록이다.
그래서, 전남 강진이 다산의 사상이 집대성된 곳으로 유명하듯이, 나는 개인적으로 이곳 금정역 터도 다산의 사상이 영글어가는 현장으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금정일록』 7월 29일 자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오죽헌은 금정역 찰방이 머무는 곳이다. 뜰 앞에 벽오동 한 그루, 참대 몇 떨기가 있어 오죽헌이라 부르게 되었다. 을묘년 가을, 나는 승지에서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
벽오동 한 그루와 참대 몇 떨기. 그 소박한 풍경이 정약용이 머물던 관사의 이름이 되었다. 이 기록은 훗날 오죽헌을 복원하려 할 때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정약용은 금정역 찰방으로 있으면서, 그는 인근 오서산을 유람했고 『유오서산기』 도 남겼다. 오서산 정상에 올라 감탄하며 지은 기행문과 한시들이 책에 전해진다. 또한 충청 수영이나 부여 백마강 등지를 다니며 여러 편의 시와 글을 써냈다.
그런데 진짜 나의 가슴을 크게 울린 것은 따로 있었다. 그는 금정역 '오죽헌'에서 매일 아침마다 바라보는 구봉산을 보며 시를 남겼다. 그 구봉산은 바로 내가 나고 자란 마을의 뒷산이다.
11월 19일 자 일기에는 구봉산을 바라보며 지은 절구가 실려 있다.
겹겹의 산 에워싸 시름진 낯 다가드니
답답하여 언제나 동이 안에 앉은 듯해
어이해야 번쾌처럼 용맹한 자 얻어서
군홧발로 구봉산을 걷어차 엎어볼까
한양에서 지내다가 청양 산골에 들어와 지내는 삶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저런 말을 했을까 이해가 되면서, 한편으로는 답답함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은 다산의 모습이 흥미롭다. 구봉산을 군홧발로 걷어차버리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산의 고요함에 익숙해졌고 다시 시를 지어 구봉산에게 사죄하는 시를 지었다.
아침마다 상쾌하여 얼굴 펴기 충분해
번화한 도회지에 있는 것보다 좋구나
어이해야 원량 같은 담박한 사람 얻어
유유히 구봉산을 앉아서 마주할꼬
너른 마음 얼굴 펴지 못할 곳이 없거니
넓은 바다 높은 하늘이 또한 이곳임에랴
만물은 절로 나서 또한 스스로 있거늘
한림은 군산을 어이 깎아내려 했던고
어린 시절 나는 구봉산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뛰어 놀았다. 그 산의 고개를 넘어 금정역 터 주변으로 물고기를 잡으로 간 기억도 있다. 그런데 다산 정약용도 그 고개를 넘고 내가 살던 마을길을 지나다녔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웅장해졌다. 그가 바라본 풍경과 지나다닌 길 위에, 나의 시간이 얹혀 있었다고 느꼈던 것이다.
구봉산(일명 천마봉)은 금북정맥의 한가운데에 있는 산이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등산객들이 이곳 구봉산을 지나다닌다. 하지만 그들은 이곳이 어떤 역사적인 배경이 있는지를 모를 것이다.
그래서 바라기는, 등산하며 걷는 이 길에 이러한 역사적인 스토리를 입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약용이 바라보는 구봉산의 시와 번암 채제공의 생가터를 알리는 표지라도 세우면, 등산객들에게도 좋은 기억이 될 것이다.
금정역을 뒤로하고, 우리는 번암 채제공의 영정이 모셔진 상의사로 향했다. 상의사는 번듯한 건물이 인상적이었지만, 찾는 이가 거의 없어 매우 쓸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평강 채씨 일가에서 관리는 하는 듯하나, 그의 명성과 업적에 비해서는 초라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생가가 있던 구재리도 들렀다. 사실 이 채제공 생가터도 최근에 지역 사학자의 노력으로 알려진 것이고, 최근 청양군에서는 이곳 생가터의 우물을 간단히 정비하여 놓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채제공은 이곳 구재리에서 15세까지 살았으며, 그의 아들(양자)인 '채홍원'의 고향이 또한 이곳이다.
하지만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정약용과 채제공을 비롯한 남인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서학을 탄압하는 명분 아래 숙청당하고 유배당하고, 이곳 청양의 채제공 가문도 풍비박산이 났을 것이다. 그의 사당과 생가터 역시 사람들의 기억에서 많이 지워졌다. 나는 이 사실이 무척 안타까웠다. 이 지역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청양군에서 장기적으로는 금정역을 복원하고, 다산과 번암 채제공을 소개하는 작은 역사관을 만든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지금 당장 다산의 시 한 수, 채제공 생가의 흔적, 그리고 이 구봉산의 이름만이라도 더 널리 알리는 방안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좋겠다.
당장에, 지금은 버려지다시피 한, 여주재 휴게소 터에 작은 관광안내판이라도 세우면 좋겠다.
금정역 터와 이 터 앞을 지나는 무한천, 그리고 채제공 생가터가 있는 구봉산 자락을 잇는 역사 기행길이 열린다면, 그 길을 걷는 이들의 마음에도 조금씩 여운이 남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