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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09. 2021

35살까지 가난하면 그건 당신 책임이다.

무작정 떠들어대는 영어실력 말고는 볼 것 없는 자의 화려한 부활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영어만 자신 있었다.

'크레이지 잉글리시'로 유명한 리양(李揚)의 '두려움을 떨쳐버리라'는 말을 가슴에 품고,

만나는 외국인마다 되지도 않는 영어로 말을 걸었다.

당시 그가 살던 곳은, 항저우에서도

외국인이 가장 많은 관광지 시후(西湖)였다.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곧바로 취업을 시작했다.

원래는 호텔 종업원에 지원했는데,

작은 키 때문에 퇴짜를 맞았다.

그렇게 몇몇 직종을 전전하면서

다시 대학입시에 도전했지만

수학 점수가 너무 낮아 떨어졌다.

삼수를 해도 수학 때문에 전문대도

가기 힘든 실력이었지만,

마침 결원이 생긴 덕분에 운 좋게

항저우 사범대학에 들어갔다.


무작정 들이대는 영어실력으로

학교 주석(회장)에 뽑힌다.

무명 대학 출신이 주변 일류대를 제치고

학생연맹 주석(회장)을

맡는 경우가 매우 적었기에 모교 후배들

사이에 전설로 남았다고 한다.

재학 도중 영어실력만을 믿고 하버드대학에도 10번이나 지원했으나

당연히 실패하였고 대학 1학년 때 만난 

여학생과 결혼했다.


대학 영어 강사를 첫 직업으로 삼았다.

당시 학생들의 회상에 의하면 강좌가 매우 재미있어서

공연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고,

기초가 약한 학생도 영어에 흥미를 느꼈으며

다른 반 학생이 호기심에 보러 올 정도였다고 한다.


영어가 인연이 되어 무역 업계 사람들과

얼굴을 익혔다.

알리바바 창립 멤버 18명 중 몇몇은 당시 그에게

영어강의를 들었던 학생이다.

알리바바 그룹의 회장,

대륙 중국의 최고 부자 투톱 중 한 명.

마윈(马云)의 창업 직전까지의 일대기이다.

정리해보면, 참 볼품없다.

물론 지금도 대단하달 것은 없는 사람이긴 하다.

거침없는 입담과 쇼맨쉽은 그가 되나 가나 크레이지 한 방식으로 따라한

영어학습에서 기인한 것이고

그의 성향부터 지금까지의 사업 성장과 인맥까지도

그 키워드 말고는 내세울 것도 없는 사람이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그를 중국 최대의 부자 자리까지 올려놓았을까?


영어강사 생활을 하면서 '하이보(海博)'라는 이름의 통역 회사로

첫 창업을 시작한다.

창업하고도 불안해서 3년이나 더 영어강사로 투잡을 뛰었다.

이 해에 항저우 10대 우수 청년 교사에 선정되었지만,

풀타임으로 창업을 하겠다며 안정된 교직을 그만뒀다.

1995년 미국에 갔다가 인터넷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다.

엄청난 량의 정보가 다른 나라는 모두 뜨는데,

중국과 관련된 자료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것이 그가 처음 발견한 인생 역전의 계기가 된다.

같은 해, '중국 최초'의 인터넷 기업인 차이나 옐로페이지(中國黃頁)를 세웠다.

'최초'라는 시도가 중요하다.

1995년에 2만 7천 위안의 자본금으로 세운,

그저 홈페이지를 만들어주는 회사였지만,

당시에는 인터넷 불모지 중국에서는 그저 사기꾼으로 취급받았다.


수도 베이징은 외국 기업들이 자금력을 내세워 경쟁자체도 되지 않았고,

고향인 항저우에 내려갔더니 경쟁 상대였던 '항저우 전신'이 자금력으로 압박했다.

1996년 3월 항저우 전신과 합병하기로 하였으나,

경영 의견에 대한 차이가 있었고,

자본과 권력에서 밀리는 마윈이 사퇴하기로 결정되었다.

야후 창립 멤버인 제리 양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며 직접 창업하겠다는 욕망을 접지 않았다.


1997년 중국 대외경제무역부에서 인터넷 네트워크 업무를 담당했는데,

차이나 옐로페이지 시절의 동료들을 데리고 가서 해낸 것이다.

대외경제무역부는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국 최초의 정부 부서였고,

베이징에 '중국 국제전자상거래센터' 회사를 세우고 마윈에게 조직관리를 맡겼다.

하지만 마윈은 공공기관 특성상 경영에 대한 규제와 간섭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약속은 30% 지분을 주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현행법상 불가능하다'라는 이유로 매우 적은 월급만 주었으며,

정부 관료들은 간부와 외부인 사이에 거리두기를 원했으며 복종, 독점, 통제만을 원했다.

이들이 낸 성과가 항저우를 떠들썩하게 했지만,

모든 성과는 대외경제무역부 간부들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으며

마윈이 그걸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윈 혼자 홀대를 받았다면 참았겠지만

마윈과 함께 일하던 창업 멤버들도 나쁜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1999년 회사를 관두고 알리바바 창업 멤버들과 함께 항저우로 떠났는데,

마윈이 그만두자고 하자 5분 만에 전원이 동의했다고 한다.

당시 시간과 돈만 따져보면 상당한 실패가 맞았다.

그러나 그는 정부 입장에서 '최초'로 인터넷을 구동했던 실무진이었다.

그에게는 무려 14개월이라는 그 경험이 있었다.

그것이 그가 알리바바를 키우는 가장 큰 시드머니가 되었다.


중국인 최초로 포브스 표지 모델이 되었다.
2003년 C2C 거래 기업 타오바오를 설립했다. 결제 시스템인 알리페이도 출시했다.
2005년 야후 차이나의 경영권을 인수하고, 야후로부터 10억 달러의 투자금을 받았다.
2006년 경쟁자 eBay를 '수수료 무료'라는 무기로 중국 시장에서 퇴출시켜버렸다.
2007년 홍콩 주식 시장에 상장했다.

2014년 뉴욕 주식 시장에 상장했다.


당신은 눈치챘는가?

그만이 가진 실패의 비밀을?

그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어쩌면 실패의 연속이었고

중국 정부와 공산당에 이용만 당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는 '중국 최초'라는 경험을 '실패'를 통해서 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다만 그는 지금의 엄청난 부를 쌓을 만큼

'중국 최초'라는 비싼 타이틀을 계속 갖췄다.

그 경험은,

일찌감치 스타우트 제의를 했던

야후의 제리 양에게도,

20분 프레젠테이션인데도 6분 만에

중단시키고 투자를

결정한 손정의에게도 확실하게 보였다.


그는 그 큰 시장인 중국의 최초 경험을 갖춘 자였고

중국이라는 어마어마한 시장을 전부 먹을 수 있는 경험을 갖춘 이로

중국 시장에 침을 흘리던 노련한 기업가들의 눈에

벌써부터 들고 있었다.


그는 아무도 시작하지 않았던 중국 시장에

누구나 알고 있던 '인터넷'을 뿌리내리는데

올인을 했고,

그 베팅은 너무도 당연히 적중했다.


물크러진 호박에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

소리, 하지도 마라.

당신이 갑자기 중국인일 수 없으며

당신이 학벌도 안 좋은데 쥐뿔도 없으면서

외국인에게 마구 들이대는 쇼맨십을 갖추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고용주에게 박봉에 이용당하면서도

자신이 이끌고 있는 팀의 리더이면서도

그 팀과 기술을 유지 발전시키면서

이용당하는 것 같으면서

오히려 유리한 경험을 선점하는 것은

중국에서 제일의 부자가 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눈치챘는가?

앞서 계속 내가 그에게 쥐뿔 능력이라고는 없다고

강조한 했던 것이

반어라는 사실을.


그는 아직도 절대강자 중국 공산당과

대치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할 정도로

혜안을 가진 무서운 부자이다.


그에게 실패가 정말 실패였을까?

당신에게 실패가 그냥 실패였다면

다시 한번 그에게서

그의 삶에서

그의 실패에서

무엇이 당신과 그를 차이 짓는지

분석하고

다시 도전하라.


당신이 그보다 꿇릴 것이

뭐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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