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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 번째 가르침, 입계의완(入界宜緩)

<위기십결(囲碁十訣)>에서 인생의 나침반을 꺼내 들다.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949


입계의완(入界宜緩) : (남의) 경계에 침투할 때는 천천히 행동해야만 한다.


바둑은 집짓기 싸움입니다. 정해진 영토에서 누가 더 많은 땅을 차지했는지를 따지는 땅따먹기 게임이죠. 물론 그 과정에서 상대방의 돌(병졸)을 따 먹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바둑의 실력이 늘어 고수로 올라갈수록 상대방의 돌을 먹는 사석의 수가 상호 간에 몇 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결국 상대방의 돌을 먹는 게임이 아니라 더 많은 땅을 차지하는 이가 이기는 게임이라고 바둑을 설명하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위기십결(囲碁十訣)’의 첫 번째 가르침에는 승부에 임하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것에서 시작하더니 두 번째 가르침에서는 처음 돌을 놓는 정석이나 포석도 아니고 뜬금없이 포석이 끝난 후의 전투에 임하는 자세로 훌쩍 순서를 건너뛰는 듯한 언급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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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을 처음 배우고 꾸준히 훈련과 수양을 통해 그 실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공부가 필수적입니다. 맨 처음 어떻게 판국을 이끌어갈지에 대한 기획을 하는 포석에서부터, 이미 역사적인 흐름과 시대의 유행까지 감안하여 발전해 온 정석에 대한 연구, 그리고 맞붙었을 때 상대의 대마를 잡거나 내가 두 집 이상을 내고 살아남아야 하는 치열한 전투, 거기에 마무리에 해당하는 끝내기 등등 그 분야와 단계는 결코 적다고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술적인 부분에 구체적인 지침들보다 ‘위기십결(囲碁十訣)’에서 강조하는 바와 같은 바둑을 두는 기본적인 마음자세를 우위에 논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될 듯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승부를 가르는 것이 명확하게 정해진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그 승부를 이길 수 있는 테크닉에 대한 부분을 일러주기보다는 전체적인 승부 자체에 대해서 어떻게 임해야만 승리를 탐하지 않으면서도 이길 수 있는지 그리고 승부가 목적인 듯하면서도, 이기기 위해 수많은 판을 질 수밖에 없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진리에 대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하는지를 ‘위기십결(囲碁十訣)’에서는 명확하게 규정해주고 있습니다.


바둑의 고수, 이른바 프로기사 수준에 오르게 되느냐 아마추어, 기원 수준에 멈추는가의 가장 큰 벽의 경계는 무엇보다 단 한 가지의 개념으로 압축해서 설명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현재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에 대한 형세를 명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 ‘형세판단’입니다. 말은 간단하게 지금 내가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하지만, 최근 바둑 TV나 바둑 중계에서 익숙한 AI가 몇 집 차이로 이기고 지는지에 대해서 화면 한 켠에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별 것 아닌 것 같은 형세판단이 아마추어인지 프로인지를 가늠하는 벽까지 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바둑이 거의 끝날 무렵에조차 아마추어는 자신이 정확하게 몇 집을 이기고 있는지 계가(計家;바둑에서 집의 숫자를 산정하여 계산하는 것)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 바둑을 업으로 삼겠다고 어린 나이에서부터 수행과 학습을 해온 프로기사들은 습관적으로 매 순간 계가를 통해 현재의 집차이를 계산합니다. 이는 돌이 거의 다 놓이는 상황에 갈수록 쉬워지지만 역으로 돌이 얼마 놓이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정확한 계가랄 것은 없이 형세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다시 말해, 돌을 서로 대여섯 개 둔 상태에서 누가 많이 이기고 지는지에 대해서는 바로 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정말로 미묘한 차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요. 포석이 모두 끝난 단계 즈음이 되면 서로 비슷하게 집을 차지하는 고수 간의 바둑이 아닌 다음에는 이미 판이 기울어져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고수 간의 바둑에서도 아마추어의 바둑까지는 아니지만 다섯 집 이상의 차이가 나는 형세라면 다섯 집 이상을 지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집차이를 메울 수 있는 공격이나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묘안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100 수정도만을 두어도 그 판세가 결정되는 경우가 있고, 150수를 넘게 두었음에도 미세한 차이로 어디를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포석이 거의 끝나가는 단계라면 서로 간의 영토가 정해지지 않은 곳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다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그 영토의 경계를 어디로 삼을 것인가로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 바둑을 제대로 배운 중수 이상급의 바둑이랄 수 있겠습니다.


바둑에서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는 프로 9단(段)의 세계 초일류 기사들조차도 바둑에서 가장 어려운 것으로 형세판단을 꼽습니다. 형세판단이 감각, 수 읽기, 전투력 등의 기량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총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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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 두 번째 가르침인, ‘입계의완(入界宜緩)’입니다. 내가 둬야 할 차례가 되었는데, 형세 판단을 해보니 조금 부족할 듯하다고 한다면 당연히 상대방의 집을 최소화로 지우고 내 집을 최대로 지을 수 있는 경계를 확보해야 합니다. 설사 내가 지금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집을 짓도록 하게 하는 것은 바둑을 가장 허망하게 지는 방법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상대의 경계를 최소화하는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것을 정하는 것이 바로 프로와 아마추어의 수준을 나누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아마추어들은 이른바 ‘깡패 바둑(?)’이라고 해서 상대방의 집에 아직 포석 단계이기 때문에 넓어 보여서 버젓이 그 경계의 깊숙한 한가운데 들어가서 두 눈을 내고 살겠다는 전횡을 저지르고 맙니다. 이것을 정수를 통해서 압살 해버리는 것이 정석이겠으나 고만고만한 아마추어의 대국에서는 이 깡패짓을 제대로 응징하지 못하고 살려줘 버리는 순간 바둑이 중간에 끝나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맙니다. 그래서 이 두 번째 가르침을 영어로는 ‘Play away from thickness.’라고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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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위기십결(囲碁十訣)’은 그런 하수들의 바둑을 바탕으로 둔 가르침이 아닙니다. 비슷한 레벨의 얕볼 수 없는 상대라면 결코 그런 깡패바둑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상대방이 포석을 통해 어느 정도 밑그림을 그려둔 집의 가장 깊숙한 곳이 내 눈에만 넓어 보여 그 안에서 충분히 살 수 있을 것 같다며 첨벙 뛰어들어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음을 이 두 번째 가르침에서는 일깨워줍니다.


정말 고수의 침투 방식은, 내 세력권 내에 깡패처럼 한복판에 들어와 경계를 가두기만 해도 알아서 죽일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계를 벗어나 내가 만든 세력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곳이 아닙니다. 가두기엔 애매하고 그렇다고 그대로 문을 닫고 상대하기에는 내 집이 어이없이 쪼그라들지도 모를 경계의 모호한 그 지점에 침투(?)합니다. 언제든 경계 밖으로 도망가서 넓은 곳에서 연결되거나 집을 낼 수도 있고, 여차했을 때는 바깥과의 연결을 담보로 앞으로 쑥쑥 들어와 내 집을 모두 헤집어버릴지도 모르는 그 애매한 경계에 돌을 둡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기보다는 남이 가진 것이 더 커 보이고 더 좋아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가져서는 안 될 욕심을 부리고 무리를 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자기 파멸로 이어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빼앗더라도 나만 행복해지면 된다는 욕심에 상대방이 어떻게 되든 말든 내 것을 더 챙기고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아집을 부리는 이들은 결코 스스로 만족할만한 행복을 찾지 못합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행복을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망쳐버리는 실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 버리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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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이 아직 100 수도 두어지지 않고 이제 겨우 포석을 통해서 서로 간의 큰 영역을 차지하겠다고 표시하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집이 무조건 커 보인다는 것은 아직 형세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는 하수 중의 하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두 번째 가르침의 네 글자 중에서 키포인트인 눈깔자(한국한문학에서 말하는 핵심이 되는 키워드를 일컫는 말)는 바로 ‘緩(느슨하다, 느리다)’라는 단어입니다. 어차피 바둑은 나 혼자 마음이 급하다고 빨리 둘 수 있는 게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속도와 강도의 완급을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바둑을 두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 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된 단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緩’이라는 단어에는 전혀 그런 뜻이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 이 단어에는 ‘신중’과 ‘면밀한 분석’이라는 선결조건들이 녹아들어 가 있습니다. 상대의 경계를 침투함에 있어 느리고 천천히 한다는 것은 그만큼 신중하다는 것이고, 상대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모두 끝난 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왜 그 자리에 두는지 다음 수에 대한 그림이 모두 계획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툭 던져보는 행위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그 자리에 두었을 때 그 이후, 그러니까 다음 수를 상대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에 대한 면밀한 수 읽기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상대 없이 혼자서 전쟁놀이를 하는 수준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바둑은 한 수씩 번갈아 두는 게임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내가 의도한 대로 두는 일이 없다는 점에서 상대방의 변화에 대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돌을 놓고 상대방이 어떻게 응수할지에 대한 다음 수조차 예측하지 않고서 내 돌을 놓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런 생각 없는 바둑 초보조차도 하기 어려운 바닥 수준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고, 상대방의 반응이나 주변의 리액션을 감안하지 않고서 그저 내 멋대로 내 욕심만 채우겠다고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언행을 한다고 해서 용납되는 곳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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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다 보면, 위기와 기회는 번갈아가며 나타나거나 혹은 동시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분명히 위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기회일 수 있고,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뭔가가 꼬이면서 위기로 나를 벼랑 끝에 몰아세우게 되곤 합니다. 결국은 그것이 위기냐 기회냐로 구분되기 이전에 그 미묘한 변화의 기로에서 내가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흐름을 이끄는 것이 바로 고수입니다.


지금의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내가 지금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어떠한 상황인지 그 상황을 가장 객관적이고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그것이 체득화되지 않고서는 내가 지금 단계에서 무엇을 더 해야 할지 무엇을 줄이고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어렵고도 중요한 가르침이 왜 두 번째 가르침에 놓였는지 이제 조금은 이해가 되시나요?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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