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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 번째 가르침, 부득탐승(不得貪勝)

<위기십결(囲碁十訣)>에서 인생의 나침반을 꺼내 들다.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947


<위기십결(囲碁十訣)>은 바둑을 두는 데 있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열 가지의 격언을 정리해 둔 것입니다. 바둑을 잘 두기 위한 10가지 비결이라는 의미로 '바둑계의 십계명(?)'이라 언급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내용은 아래 열 가지입니다.

<위기십결(囲碁十訣)>을 남겼다고 알려진 저자는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이자 당 현종의 바둑 상대였던, 기대소(棋待詔) 벼슬을 지냈던 바둑고수 왕적신(王積薪)이라는 설이 한동안의 정설이었습니다. 다른 일설에 따르면, 중국 북송(北宋)의 반신수(潘愼修)라는 사람이 지어 태종(太宗)에게 올린 글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만, 1992년 대만의 중국교육성 바둑편찬위원인 주명원(朱銘源)이 <위기십결(囲碁十訣)>이 왕적신(王積薪)의 저작이 아니라 송나라 때 사람 유중보(劉仲甫)의 저작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제기함에 따라 현재 원작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는 韓中日 바둑사 연구가들의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굳이 한자가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많을 텐데 한자표기를 한 이유는 ‘위기십결(囲碁十訣)’의 ‘위기’가 행여 위태로움을 의미하는 ‘위기(危機; crisis)’로 오독(誤讀)하는 이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죠. 위기를 타개하는 열 가지 어쩌고 따위로 대강 이해하는 것은 시작부터 아주 심각한 논리적 오류를 배태하는 일이니까요.


앞으로도 간혹 나오겠지만 바둑은 수천 년 전 중국에서 시작된 이유로, 대개의 용어나 개념 혹은 그 설명하는 내용들이 중세 한자 문화권의 영향으로 한자가 많습니다. 때문에 한자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명확하지 못하게 되면 그 행간의 의미를 길어내는 작업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그 전문적인 영역은 학자인 제가 쉽게 풀어 설명할 테니 새삼 한자 공부를 시작할 것까지는 없겠으나 그래도 조금은 관심을 갖고 정독(精讀)할 필요는 있겠습니다. 공부하라는 꼰대의 딱딱한 강의가 목적인 칼럼이 아니니 이 정도로 각설하고, ‘위기십결(囲碁十訣)’의 첫 번째 가르침을 바로 살펴볼까요?


부득탐승(不得貪勝) : 승리를 탐해서는 안된다.

이 짧은 네 글자의 의미는 그리 어려운 한자어도 없고 의미도 단순 명료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한 두어 번 다시 소리 내어 읽어보면서 행간의 의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특히 이것인 승부를 결정지어야만 하는 바둑에 있어서 왜 첫 번째 격언으로 나왔는지를 생각하면 그리 만만하게 해석될만한 내용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승부를 목적으로 하는, (조금 어패가 있긴 하지만) 이겨야 의미가 있는 게임에서 다짜고짜 승리를 탐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의문을 풀 수 있는 핵심 키워드는 바로 ‘탐내다(貪)’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이 첫 번째 가르침을 영어로 번역하면 “Greed for the win takes the win away.”로 풀이가 되는데, 여기서 ‘Greed’가 바로 ‘탐내다(貪)’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선문답(禪問答)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이 문구를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바둑에 있어 오직 승리에 집착하지 말고 필승의 신념으로 과감하게 두어야 한다.”라는 정도가 될 듯합니다.

‘탐내다(貪)’는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너무 이기려고만 들지 말라’는 조언이 이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바둑은 승부를 다투는 게임이므로 필승의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하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필승의 신념이라는 것과 무조건 이기려고만 하는 마음은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됩니다.


필승의 신념이란, 과감하게 나가야 할 때 과감할 수도 있고, 모험을 해야 할 상황이라면 모험도 불사할 수가 있다는 여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무조건 이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란 절대 져서는 안 된다는 집착에 방점을 두고 있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이는 바둑을 처음 배우는 초심자들이 그저 단순한 승부욕에, ‘상대방에게 지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감과 심리적 부담을 먼저 갖게 되는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과 같습니다.


미묘한 말장난처럼 들리시나요? 그러면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설명할 수밖에 없겠네요.


부득탐승(不得貪勝)의 의미는 본래 ‘탐즉다패(貪則多敗)’였다는 역사학자의 일설이 있습니다. 1899년 둔황(敦煌)에서 도굴되어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자료가 1980년대 해제되는 과정에 발견된 <둔황기경(敦煌棋經>'(북주 557~581)이라는 서적 속에서 처음 이 ‘탐즉다패(貪則多敗)’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됩니다. ‘욕심을 부리면 많이 질 수밖에 없다.’ 정도의 해석인데요. 이 오래된 용어가 명청대의 바둑서적에 언급되면서 부득탐승(不得貪勝)의 형태로 바뀌었다고 보는 역사학자들의 견해가 다수입니다. 명청시기의 책들이 조선시대로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각종 바둑서적에서도 자연스럽게 부득탐승(不得貪勝)은 같은 의미로 치환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무조건 이겨야만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을 가져서는 바둑을 활달하게 둘 수 있을 리 없습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게 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이기야만 한다는 부담은 뒤집어보면 “절대 져서는 안 된다.”는 불안감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이러한 불안감은 유연성 없이 뻣뻣하게 굳어 평상시의 실력을 모두 발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마음만 조급해져 국면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 부분에 국한되어 시야를 편협하게 만들어 바둑을 망치게 만듭니다.


‘내가 그곳에 돌을 두었다가 패착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혹은 ‘굳이 무리하게 전투를 벌였다가 내 대마가 죽어버리게 되면 바둑이 그냥 끝나버리는데 그럼 어떡하지?’ 등등의 불안감은 결국 승리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만의 바둑을 두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위축되어 상대방의 바둑에 질질 끌려다니다가 만신창이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부득탐승은 쉽게 말하면, ‘어깨에 힘을 빼고 바둑을 두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평상시에 호선으로 바둑 실력이 비슷한 상대와 치수고치기를 하겠다고 잔뜩 업되어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되면 평소에는 분명히 비슷하던 실력이었음에도 연패를 거듭하고 호선이던 바둑이 금세 2점, 3점으로 올라가 버리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위기십결(囲碁十訣)>의 저자가 굳이 바둑을 잘 두기 위한 10가지 비결을 연구하여 내놓으면서 바둑의 구체적인 기술을 제쳐두고 부득탐승(不得貪勝)이라는 마음자세를 제일 위에 둔 이유는 아마도 이것이 바둑실력을 한 차원 다르게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 가장 선결되어야 할 조건이자, 그만큼 실천하기가 가장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봅니다.

상대에게 무조건 이기겠다는 아집은 사고를 경직시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스스로의 바둑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것은 그와 별개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상대방을 얕보고 상대방의 돌을 모두 잡으러 가겠다는 것은 욕심이지만, 내가 내 바둑에 자신감을 가지고 나만의 바둑을 펼치는 것은 기력의 증진에 필수적입니다. 이기겠다며 다른 사람의 바둑을 흉내내기만 하거나 과감하게 공격해야 할 시기에 형세가 적당하니 승리를 위해 무리를 하지 않겠다고 움츠려 들기만 해서는 바둑이 결코 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신감과 이기려는 욕심은 분명 구분됩니다. 자신의 실력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욕심은 그저 나를 초라하게 만들 뿐이지만, 연습과 훈련을 통해 얻게 된 자신감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의 고유한 품격과 심리적인 여유로 정서적인 풍요로움을 더하게 합니다. 이기려는 욕심보다 자신이 연습했고 자신이 계산해서 이미 검증이 끝난 흔들리지 않는 확신, 어느 한 부분에 국한되지 않은 전체 판에 대한 균형 잡힌 인식과 판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그야말로 지기 어려운 상황으로 이끌, 승리의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려고만 하면 죽게 될 것이다.)’의 가르침처럼 그저 이겨야겠다는 욕심만으로 과도한 공격만을 거듭하게 되면 어느 사이엔가 자신의 돌들이 모두 끊어지고 대마가 죽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바둑은 끝나버려 있을 것입니다.


상대에게 먹히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는 바둑과 내 집을 확고하게 지키는 바둑의 경계를 알게 되는 것은 내가 현재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를 아는 것보다 조금 더 앞서 갖춰야 할 감각이자 훈련으로 만들어 나가야 할 내공입니다.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다고 하지만, 자신이 가진 것에 끝없이 만족하지 않고 과욕을 부리는 것과 내가 갖춘 부분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반성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인생에 있어 반드시 이겨야 할 것은 내 비교대상인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지금까지의 노력에 만족한다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으면서 그저 우연히 몇 번 얻게 된 불로소득을 마치 자신의 노력인 양 착각하고 옳지 못한 방법으로 더 많은 금전을 취하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그 인생을 그르치고 만다는 진리는 바둑이 생긴 수천 년 전부터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틀어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스스로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분에 맞게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언제까지나 편안할 수 있느니라.)”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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