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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네 번째 가르침, 기자쟁선(棄子爭先)

<위기십결(囲碁十訣)>에서 인생의 나침반을 꺼내 들다.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952


기자쟁선(棄子爭先) : 돌(몇 점)을 버리더라도 선수(先手)를 잡아야 한다.

앞서 가르침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네 번째 가르침을 보면서 네 글자로 이루어진 위기십결(囲碁十訣)의 문구가 갖는 한문문법적인 특징이 앞의 두 글자와 뒤의 두 글자가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의미로 완성되는 것에 익숙해졌을 듯합니다.


위에 해석을 적으면서 괄호로 표기를 하기는 했지만, 돌 자체를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더 작은 돌을 버리고서라도 선수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강조를 역설적으로 하고 있는 내용이 네 번째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이미 강조한 바 있다시피, 바둑은 선수(先手), 즉 누가 먼저 두는가에 매우 큰 이점을 갖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증거로 바둑을 먼저 두게 되는 흑돌의 경우, 덤이라고 하여 먼저 두는 핸디캡의 의미로 집을 6집 반을 공제합니다. 다시 말해, 먼저 두는 사람이 한 수 먼저 두기 때문에 유리하니 나중에 집을 셀 때, 6집 반을 백에게 양보해서 계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중국식 룰로 보면, 덤을 7집 반까지 두고 있을 정도로 바둑에서 선수(先手)가 갖는 의미는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논외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최근 발달된 바둑 인공지능의 분석 결과, 중국식 룰로 7.5집의 덤으로 승부를 시작하게 되면, 흑이 1.7집 불리하게 시작된다고 판단합니다.


그저 누가 먼저 두느냐에 대한 것임에도 먼저 두는 사람의 이익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인 셈이죠. 그래서 이번 가르침에서 돌을 몇 점 버리더라도 선수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바둑을 잘 모르거나 초보에 해당하는 하수들의 입장에서는 처음 바둑을 시작할 때야 어쩔 수 없이 약속에 의해 먼저 둔 사람에게 핸디캡을 적용한다 결국 그 순서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냐고 따져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서 바둑의 고수와 하수,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가 확인됩니다. 처음 바둑을 시작할 때 먼저 두는 사람은 선수(先手)가 맞습니다. 하지만, 바로 세 번째 수, 다섯 번째 수에서도 선수(先手)인가에 대해서는 바둑돌이 바둑판에 놓아지는 수가 많아질수록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더 큰 곳이거나 더 위급한 곳의 판단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인데요. 처음 돌을 둘 때는 서로 큰 곳을 차지하기 위한 포석을 하는 것이니 그 차이가 없다고 하더라도 먼저 두었던 돌이 집중 공략을 받아 처음 두었던 영역 표시가 의미가 없어지는 상황이 발생하거나 판의 형세상 내가 둔 곳보다 훨씬 더 크게 확장할 수 있는 영역에 상대가 돌을 두게 된다면 흐름은 상대가 둔 곳에 방비를 하거나 전투에 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나는 당연히 상대가 내가 둔 곳에 상대가 둘 것으로 예상하고 판의 흐름을 내가 선수(先手)인 상태로 이끌어가겠다고 바둑을 두지만, 수준이 높은 상대일수록 내 의도대로 따라와 주지 않습니다. 세상살이가 모두 내가 예상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인 셈이죠. 여기서 다시 선택의 기로에 갈리게 됩니다. 과연 상대의 반발에 내 판단이 틀려 상대에게 허점을 찔린 것이라 상대에게 선수를 빼앗길지 아니면 상대의 반발이 잘못된 판단임을 응징하여 내가 둔 곳이 선수였음에도 제대로 방비하지 않았음을 입증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앞선 세 가지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은연중에 바둑에서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형세 판단’에 있음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 중요한 형세 판단과는 별개로 바둑이 한 단계도 아닌 어느 순간 수직상승하여 벽을 뛰어넘는 기준이 되는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돌을 버릴 줄 아는가 하는 ‘기자(棄子)’에 대한 부분입니다.


바둑을 처음 배운 하수일수록 자신의 돌이 단 하나라도 죽어나가는 것을 못 견뎌합니다. 내 돌은 모두 살려야 하고 상대방의 돌은 다 잡겠다는 짐승(?)의 생존본능에 가까운 의식에서 바둑의 하수는 탄생합니다. 차츰 바둑의 룰을 익혀가고 재미를 익혀가는 동시에 실력이 늘어가면서 요석(要石)과 폐석(廢石)의 차이와 내 돌을 버리는 것이 더 큰 살리는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요석(要石)이란 결코 죽여서는 안 될 매우 주요한 위치와 가치를 가지고 있는 돌을 의미하는 것이고 폐석(廢石)은 아쉽긴 하지만 그것을 버리는 것이 승부에 큰 대세의 영향을 주지 않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처음부터 바둑돌에 가치가 부여되지는 않습니다. 결국 그 돌(군사)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사령관역할의 바둑을 두는 이의 역할입니다. 요석(要石)은 의미가 명확하기 그렇다 손 치더라도 도대체 버릴 돌을 굳이 왜 두느냐며 폐석(廢石)의 의미를 되묻는 하수들이 많습니다.


명확하게 규정하자면 원래 ‘폐석(廢石)’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네 번째 가르침에서 의미하는 것과 같이 그것이 반드시 살려야 하는 중요한 돌이 아니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자 그 돌을 죽이고 다른 곳에서 선수(先手)를 잡는 것이 훨씬 더 크다는 의미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먼저 두는 의미에서 덤으로 6집 반이라는 핸디캡을 준다는 의미에서 보자면, 6집 반의 가치가 아니라면 그것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곳이라면 당연히 그 돌을 버리고 더 큰 자리를 가서 선수를 차지하는 것이 바둑의 이치입니다.


‘돌을 키워서 버리라.’라는 격언이 있는 것처럼 돌을 버리는 사석작전에도 전체 판을 읽고 형세판단을 하고 난 뒤 전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곳을 버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된 판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고수가 아니라 초보자의 단계를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실 요석을 지키는 것보다 폐석을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더 높은 단계의 기력을 보여주는 단초라 할 수 있는 것도 위에 설명한 이유에서 입니다.


바둑의 고수의 단계로 올라갈수록 돌을 과감히 버릴 줄 알고, 손을 과감히 뺄 줄 안다는 사실은 바둑을 배우는 이들에게는 금과옥조(金科玉條)와 같은 가르침입니다. 말은 쉽지만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실행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초심자의 눈에 보기에는 꽤나 큰 대마로 보이는 돌인 듯한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가일수를 하지 않고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자리에 돌을 두는 것을 보면서 초심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곤 합니다. 그것이 이해가 간다면 초심자가 아니라 고수일테니 너무도 당연한 모습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한 시대를 호령했던 중국의 섭위평(聶衛平) 9단은 “버려라. 그러면 이긴다.”라는 말을 자신의 승부 좌우명으로 삼았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돌이 모두 한 통속에 들어 있을 때는 그저 의미 없는 바둑돌이지만 바둑을 두는 기사에 의해 바둑돌에 한 점 한 점 돌려지는 순간, 그 돌은 군사로서의 생명을 가지고 전쟁터에 배치됩니다. 그렇게 배치된 군사들은 당연히 자신의 임무라는 것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그 임무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사령관인 바둑을 두는 이의 머릿속에만 있지요. 그 돌들이 처음에 자신이 가진 임무가 바둑이 끝날 때까지 의미를 갖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전체 판을 위해 단기적인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임무를 모두 마친 돌들이 대개 폐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결국 그 돌이 살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능력에서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단 하나의 손해도 없이 이익만을 챙기겠다는 것은 앞서 표현했던 ‘짐승적인 본능’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적당히 손해도 보면서 살라는 개똥철학을 펼쳐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세상을 살면서 우리에게 존경을 받고 더 위에 올라간 이들의 삶이 갖는 공통점을 말하고자 합니다. 결국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우선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지에 대해서 일의 경중을 따져야만 합니다.


바둑보다 훨씬 더 복잡다단하기 그지없는 인생은 여러 가지 이유로 우선가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목적을 돈에 두는지 명예에 두는지 건강을 최우선으로 두는지 등등 저마다 판단의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바둑의 가르침에서 일러주는 것처럼 궁극적인 어떤 일에 먼저 더 집중해서 처리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에서 인생의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이 바둑과 같이 이겨야 한다는 승부의 목적이 명확한지를 누가 어떻게 단순히 규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누군가의 판단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어떤 형태로 완성시켜 나가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스스로의 문제입니다.


훨씬 더 소중하고 중요한 가치가 있는 부분을 경시하고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 절대 하나도 손해보지 않겠다고 아등바등거리다가 모든 것을 다 놓쳐버리고 자신이 인생은 물론이고 자신이 챙겨주어야 할 사랑하는 이들의 삶까지 힘겹게 만드는 실수를 저지르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무엇이 자신의 삶에서 더 급하고 중요하며 더 가치가 큰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바둑에서 형세를 판단하는 것 이상으로 어렵기 그지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계속해서 판단하려고 하고 실수를 통해서라도 계속 더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의 삶은, 당장은 큰 차이가 없어 보일지 모르겠으나 삶의 나날이 켜켜이 쌓여가게 되면 어느 순간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기 마련입니다.


바둑의 승부를 결정하는 게임인 것은 맞지만, 처음부터 단 한 번도 지지 않고 입신의 경지에 이르는 고수가 없는 것과 같이 수많은 바둑에 패배를 기록하게 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둑은 승리한 바둑에서 얻는 교훈보다 패배한 바둑에서 얻는 교훈이 훨씬 더 크고 그 가르침과 발전정도에 더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인생에서 매일매일이 한판의 바둑이라면 매일같이 이겠다며, 한 판도 지지 않겠다고 모든 에너지를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움켜쥐는 행태는 쉽게 사람을 지쳐 나가떨어지게 만듭니다. 바둑이 그저 많이 두기만 한다고 실력이 느는 것도 아니거니와 매번 이기기만 하는 바둑을 한다고 해서 실력이 느는 것은 더더군다나 아닙니다.


무엇이 정말로 나의 삶에 급하고 소중한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모색하고 수양하며 조심스럽게 운신하는 삶의 태도가 바둑에만 필요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번 가르침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아프지만 그것을 마음에서 놓아줄 수 있는 것, 내려놓을 수 있는 삶의 태도를 가질 수 있다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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