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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섯 번째 가르침, 봉위수기(逢危須棄)

<위기십결(囲碁十訣)>에서 인생의 나침반을 꺼내 들다.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955


봉위수기(逢危須棄) : 위험에 처하게 되면 모름지기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바로 앞에서 살펴보았던 사소취대(捨小就大)의 ‘사(捨; 버리다)’의 의미가 가지고 있던 바와 마찬가지로, 여섯 번째 가르침인 ‘봉위수기(逢危須棄)’에서도 ‘기(棄; 버리다)’라는 같은 의미를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앞의 두 글자에서 전제하고 있는 상황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 때나 내 돌(군사)을 버리고 내쳐버리게 된다면 사령관으로서 전쟁에 승리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니까요. 위에 번역에서는 문자 그대로, ‘위험에 처하게 되면’이라고 번역하였지만 여기서의 위험은 단순히 내가 위태로운 상황임을 뜻하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본래 위험이라는 것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위태로움을 뜻하는 의미로도 일반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자칫, ‘위험함을 느끼게 되는 상황에서는 무조건 내 돌을 버리라는 의미인가?’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둑의 초보를 조금이나마 넘어 판국을 읽거나 고수의 바둑에서 감탄하는 부분을 느낄 수 있는 시선을 갖추게 되면 바둑에서의 ‘위험’이라는 의미가 결국은 자신이 처음부터 잘못된 수를 두었기에 스스로 자초한 위태로움이라는 의미임을 누구나 공감하게 됩니다.


물론 상대가 예리한 수를 두어 공격이 매서워 내 돌이 위태로워지는 경우도 있지 않겠느냐고 막연히 반박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하수나 하는 어리석은 질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차 강조한 바와 같이 바둑은 서로 한 수씩을 교차하는 공정한 공수의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멀쩡한 바둑에서 내가 갑작스럽게 위기를 당하는 경우란, 내가 제대로 방비를 하지 못하여 응수가 올바르지 않았거나 판국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내 돌이 약한 것도 모르고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위험을 ‘초래’하는 경우 말고는 위태로워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둑에 한정된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갑작스러운 위험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내가 충분히 예견하고 준비할 수 있는 일들이었음에도 안일하게 반응하고 도외시한 결과로 위험을 초래하는 경우가 다반사임을 인생의 교훈을 통해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섯 번째의 가르침에서는 그 위험을 스스로 초래한 것에 대한 후회나 반성을 질책하기보다는 그러한 실수를 어떻게 극복하고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다음 단계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 해답이 바로 ‘버려라(棄)’입니다.


잘못 두어 위태로움을 초래한 곤마를 그냥 넙죽 버리고 손을 빼는 것이 과연 좋은 방편이냐고 당장에 질문이 쇄도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되나 가나 위험하기만 하면 돌을 버리라는 가르침은 당연히 아닙니다. 이 네 글자의 행간에는 앞서 우리가 다섯 가지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배웠던 바둑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형세판단’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살려야 할지를 정확한 형세 판단을 통해서 분석하고 나서 빠르게 결정해서 어차피 죽어가는 돌에 가일수를 하여 상대방에게 좋은 일을 해주는 우를 범하지 말고, 차라리 그 돌을 버리면서라도 바로 선수를 잡아갈 수 있는 길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바둑을 처음 배운 초보들의 가장 어리석은 욕심은 상대방의 돌을 모두 다 잡아먹으려 들고, 내 돌은 단 하나도 죽이지 않으려는 마음이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만약 내 돌이 하나도 잡히지 않고 상대방의 돌을 모두 다 잡는다면 그건 바둑이 아니라 저인망식 그물잡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비슷한 혹은 나보다 조금 더 나을지도 모르는 정선이나 호선의 상대에게 그런 압도적인 승리를 하는 바둑은 그 어느 기보(棋譜)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어떤 희생도 치르지 않고 내가 원하는 승리를 얻는 전쟁은 역사상 찾아보기 힘듭니다. 여기서 희생이란 불가피하다는 의미에 더 비중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버림으로 인해 얻었던 선수(先手) 혹은 더 큰 가치를 지키거나 확보할 수 있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비슷한 기력인 것 같으면서도 늘 한 발 앞서 있는 상대가 어리석은 상대를 요리할 때는 언제나 그가 혹해할 만한 꺼리를 만들어 함정을 만듭니다. 나중에 계산해 보면 상대적으로 더 작은 가치를 가지고 있거나 계속 키워봐야 죽기만 하는 곤마임에도 감정을 자극하여 절대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게 합니다.


이 여섯 번째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것은 두 가지입니다. 언제, 어떻게 버리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예컨대, 돌을 키워서 버려야 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던 나의 곤마를 포기할 것인가 살려야 할 것인가를 판단하고 난 뒤에 그것을 언제 포기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형태로 포기할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손을 빼고 버린다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최소한 지금 가일수를 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보다 조금 더 큰 가치의 자리에 선수(先手)를 차지함으로써 상대도 그쪽에 가일수를 할 수 없게 만든다면 일단 그 위기의 상태는 더 이상 악화하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대개의 인생사가 그렇듯이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해도 폭망은 아닐 일을 괜스레 감정이 잔뜩 들어가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일이 더 크게 망가져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하곤 합니다. 바둑에서처럼 차라리 그쪽에서 손을 빼고 더 중요하고 더 큰 자리를 공략하다 보면 의외의 활용도가 죽어있던 곤마에서도 나오곤 합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곤마가 기적적으로 살아 나오게 되는 활로를 찾게 되는 것도 결국 그 곤마에 가일수를 하는 경우보다 주변의 다른 큰 자리와 연계되어 상황을 반전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작게든 크게든 모든 문제들이 매일같이 일어나 에너지를 쓰게 만듭니다.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결국 자신이 해결할 수도 없는 인생의 문제들을 모두 떠안고 스스로를 비관하며 매번 자책하다 못해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어리석은 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비관과 자책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여섯 번째 가르침에서는 해결책에 대해서 논합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태를 직시할 줄 아는 냉정함이며, 차가운 이성과 분별력 그리고 어떻게 할지 결정할 때까지 흔들리지 않는 꿋꿋함입니다. 주식에서 손해가 나기 시작했을 때 손절의 기준을 명확하게 가지고 있는 고수들의 경우, 자신이 손절기준을 넘어서 손절을 한 시점에서 설사 급반등을 하여 조금 더 기다렸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는 후회를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고수로서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불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이익이 하늘같이 솟구치는 경우에는 그 기준이 더욱 중요합니다. 익절을 제때 하지 못하는 경우 더 많이 먹겠다고 기다리다가 한순간에 폭락을 목도하며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봉위수기(逢危須棄)’ 영어로 ‘When in danger, abandon.’라고 명확하고 단순하게 번역합니다. 영어의 뜻만으로 보자면, ‘위험이 닥치면 버리라!’가 되니까요. 진짜 고수는 이런 하수들의 심리를 아주 교묘하게 이용합니다. 곤마임에도 놓치기 싫어하는 하수의 본능을 자극하여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못하고 기어코 그 작던 곤마를 키워 겨우겨우 두 눈만 뜨고(두 집만 내고라는 바둑식 설명입니다.) 살려줍니다. 그 곤마를 살렸다고 안도할 즈음, 바둑은 이미 판국이 넘어가 자신의 목이 달아난 줄도 모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죠. 바둑에서 말하는 ‘생이불여사(生而不如死;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다)’는 용어는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살다 보면, 그러한 사람들의 본능을 이용한 사기행각은 수도 없이 뉴스에 타고 흘러넘칩니다. 차근히 자신의 노력으로 번 돈을 저축하고 적금을 들고 아끼고 아껴 그것으로 집을 사거나 부자가 되는 일은 꿈도 꿔보지 못할 시대가 되었다고들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순간에 부자가 될 수 있는 도깨비방망이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하수들은 늘 그 말에 속아 오히려 자신이 모아 왔던 모든 것을 그야말로 한 방에 날리고서야 땅을 치고 후회를 합니다.


바둑에서의 위험은 교통사고나 천재지변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결국 내가 자초한 일이기에 이 여섯 번째 가르침은 위험이 닥치면 버리라고 극단적인(?) 설명을 내놓은 것입니다. 바둑에서도 인생에서도 결국 위험은 닥치기 마련입니다. 늘 꽃밭을 걸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인생의 파고가 있지만 그 파고에 휩쓸려 날아가버리는 이가 있는 반면, 그 파고위로 타고 올라가 멋지게 파도타기에 성공하는 이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파도 위로 올라서기까지 수많은 실패를 통해 물을 먹고 바다 밑으로 처박히고 온몸 성한 곳이 없이 욱신거림의 연속을 이겨낸 이만이 그 파도를 어떻게 이겨내고 그 위로 어떻게 올라서야 하는지를 체득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둑은 단판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최후의 일국이란 없는 것이죠. 끊임없는 일국 속에서 계속에서 자신의 실수를 수정해 가고 실력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는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인생 역시 단 한방에 무언가 결정되는 일은 없습니다. 당신이 지겨워했을지도 모르는 그 무료해 보이는 하루하루의 패턴이 쌓여 결국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고 당신의 인생을 이루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당신만 모르고 있는 일국(一局)이 쌓여 당신의 인생 기력(棋力)이 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이 멍하니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멈춰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당신이 멈춰있는 동안에도 꾸준히 한 수 한 수 공력을 쌓아가며 달려가는 상대들은 이미 저만치 달려가고 있으니까요.

위험이 닥칠 때마다 버리고 도망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면 이제라도 깨닫고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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