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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23. 2021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살기에 좋은 곳은 어디인가?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마을의 조건

子曰: "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마을의 (인심이) 인후한 것이 아름다우니, 인심이 좋은 마을을 선택하되 仁에 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혜롭다 하겠는가?"

주자는 이 장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마을에 인후(仁厚)한 풍속이 있는 것이 아름다우니, 그러한 마을을 선택하되 이에 처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 시비(是非)의 본심을 잃은 것이어서 지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仁者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처하는 곳도 잘 선택해야만 한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문법 구조가 '처하는 곳이 좋아야 한다'의 방식이 아니라, '잘 선택하되, 그곳에 처하지 않는다면 지혜로운 것이 아니다.'라는 복잡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물론 부정의 방식은 강조를 위해 선택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묘하다. 이것은 공자가 강조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 두 가지이고, 그것을 한 문장으로 집어넣어 설명하는데서 나오는 생경함이다.

첫 번째 강조하는 바는 너무도 당연하다. 인심이 좋은 마을을 거처할 곳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

방점은 두 번째에 있다. 그곳을 선택하더라도 仁에 처하지 않는다면 지혜롭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단순하고 말 뒤에 슬쩍 오랫동안 생각하게 만드는 문장을 넣는 자연스러움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이유로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장의 해석에서 주자는 '里(리)'를 '마을'로 해석하고 있지만, 맹자는 공손추장구상(公孫丑章句上)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里(리)를 '거처하다.'라고 해석을 해서, '인에 거처하는 것이 미덕이다. 택하여 인에 거처하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라는 해석을 하였다. 나는 맹자답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이 옳은 해석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處(처)와 관련하여 맹자 식 문법으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해석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정도로 추측하지만, 여기서는 주자의 해석을 택하기로 한다.

공자 특유의 복잡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 이해하라고 던져놓는 식의 논법을 이해해보기로 하자.

나라든 마을이든 전체가 풍속이나 인심이 인후하기는 어렵다. 대체적으로 그런 분위기를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니 仁者가 되려는 사람은 그러한 곳을 택하되, 자신또한 그것을 배우고 자신의 仁을 수양해야만 한다. 그것이 교학상장이 되어 윈윈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그것을 아는 것은'이라고 하지 않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이라고 한 것 역시 공부를 깊이 한 자만이 알아들으라는 공자식의 논법이다.

아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실행'해야 한다는 강조점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것이다.

마지막에 마지막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다'라는 의미로 마무리한 것도 같은 의미이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알고 따위가 아니라 지혜로운가 아닌가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주자는 그 의미를 시비의 본심, 즉,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기본의 기본으로 지혜를 풀어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이 '이인 편'을 시작하면서 앞으로 계속 언급할 仁의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을 풀기 위한 오리엔테이션에 해당하기에 그 의미를 제대로 새길 필요가 있다.

많이 배우고 좋은 대학을 나온 부모에게서 막돼먹은 자식이 나올 리가 없다는 식의 논리는 터무니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말을 고상하게 풀어쓴 것에 다름 아니다.

가방끈의 길이와 상관없이, 사람을 공경할 줄 알고, 기본적인 예의를 갖출 줄 알며, 말을 삼가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부모에게서만이 제대로 가정교육을 받은 자식이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

왜 가능성이라는 말로 완곡하고 조심스럽게 말하느냐고?

그 부모가 그런 좋은 성향을 갖추고 있더라도 자식의 교육에 소홀할 수 있으며, 혹여 가르치려고 하더라도 자식이 다른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해 삐뚤어질 수도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장은 그 가능성까지도 염두에 둔 강조이다.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간다면 다시 풀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마을이 인심이 후덕하고 아무리 풍속이 좋더라도 그렇지 않은 이들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그나마 그곳이 최선이라고 선택한 자가, 자신이 그곳에 속해있으면서 제대로 된 仁을 수양하여 체행하지 않는다면 그 처할 곳을 택한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풀어 이해하고 나니, 별 것 아닌 것 같았던 저 짧은 문장이 이리도 깊은 뜻을 이중삼중으로 가지고 있을 줄을 꿈에도 짐작하지 못하고 그저 '이인 편'의 첫 장을 읽어 넘어갔던 이들이 얼마나 많았을지를 우리는 딱하게 여기기로 한다.

대개 위의 사진에 영어까지 집어넣어 설명한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않겠는가?


모 서울의 아파트촌에 위치한 학교의 선생이 학생들에게 어느 아파트에 사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어느 아파트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평수와 경제적 수준 등을 아주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선생이라고 부른 학생들이 딱했고 그런 사람이 선생을 한다는 현실이 마음 아팠다.


사는 동네가 어디인지를 물어 서울 강남에 사는지, 강북에 사는지를 가지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이들이 있다.

강남에 산다고 하는 이들은, 더 나아가 상대가 사는 곳이 도곡동인지, 청담동인지, 대치동인지를 묻고 그것으로 사람을 평가하곤 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청담동에서 20대를 보내던 그즈음, 구찌 골목의 주유소 큰길을 사이에 두고 대한민국의 민낯이 명징하게 드러나는 것을 확인한 경험이 있다.

주유소 위쪽 언덕으로 이어지는 빌라촌과 반대쪽의 한강이 보이는 빌라를 사이에 두고, 겨울에 연탄재를 내놓는 다세대 주택지가 모여 있는 지역이 있었다. 행정구역상 그곳은 모두 청담동이었다.

뭐 비근한 예는, 아파트 촌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흔히 말하는 같은 아파트의 이름을 두고서도 민간분양과 임대아파트 사이의 간극은 그들이 만들어놓은 철조망보다 훨씬 더 크고 높게 가로막혀 놓여있는 경우가 많다.


비싸고 좋은 집에 사는 사람들끼리 그룹을 지어,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자신의 동네에 감히(?) 발을 들여놓는 것을 기피하는 현상의 근거에 대해 '본능'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본능이 짐승에 가까운 것에 쓰는 말이라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당신이 사는 곳은 당신을 상징하거나 당신을 나타내는 곳이 아니다.

그것은 건설업으로 돈을 벌어먹은 저 하찮은 건설회사에서 자신들의 아파트 브랜드를 광고하면서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경제적 여력이 되면서도 부러 산동네 좁은 집을 찾아서 살 필요는 없겠지만, 같은 이유로 부러 내세우기 위해 더 비싸고 더 좋은 집을 찾아 사는 것 또한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란 뜻이다.

내가 곁에서 관찰한 바에 의하면, 지금 전문직 혹은 상위 몇 % 라며 나대는, 나이를 좀 지긋이 먹은 자들은 서울에 새로 지은 주상복합이나 좋은 남의 집에서 비싼 전세로 살면서 강남의 재건축을 앞두고 있는 오래되고 낡은 자신의 집에 세입자를 들여놓고 재산이 더 불어날 것을 배를 두들기며 기다리고 있는 구조가 많다.


왜 그것이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 버렸을까?

내 집이 낡았고 불편해서 새 집에서 살고 싶으면 낡은 집을 팔고 새 집으로 이사를 가면 되는 것 아닌가?


어느 사이엔가 부의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된 집에 대한 것이 이렇게 삐뚤어졌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만큼 더 홀대하고 간과하지 않겠는가?

내가 제대로 공부하고 싶으면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싶고 그래야만 한다.

내가 더 높은 수준의 仁者가 되려면 그러한 이들이 많은 곳에 처하고 그들과 생각을 나누고 함께 공부하며 배우고 나눠야만 늘 수 있다.

본래 우리가 알고 있는 1억 원 이상 기부를 이들의 클럽 따위도 본래의 취지도 이러한 것이었다.


정말 산해진미를 다 먹어보지 않은 이는 그저 산해진미를 상상하고 소문만으로 동경할 뿐이다.

하지만 산해진미를 모두 먹어본 사람은 쓸데없는 소문이나 나대기 위해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입에 넣어 씹으며 '역시 비싼 것이 맛있다'라는 연기를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仁者가 자신의 수양을 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주변을 그리고 그 사회를 정화시키고 함께 더 높은 경지로 업그레이드되는 것은 그가 공부하고 수양하는 이유이다.


지저분하고 냄새나며 구정물이 뚝뚝 떨어지는 곳에서 지내고 싶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당장 당신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로 냄새가 맡아지는 것에는 그러하면서

정작 훨씬 더 심각한 당신의 정신상태가 썩어문들어지고 더 곯아 터질 곳이 없는 지경임을 모르면서 하하 깔깔대며 지 배 불리겠다고 더 비싸고 좋은 동네를 찾아다니며 살 곳을 찾는 것은 너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내가 잊고 지났던 부끄러움을 반성하게 하는 이,

그러한 이들이 함께 하는 마을, 사회에서 거처하려 하지 않으면서

당신이 뭘 그리 배웠답시고 우쭐거리려 드는가?

당신이 그렇게 수양하여 당신이 사는 곳으로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것이

당신의 과제이자 당신의 삶이 지향하는 바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수천 년 전 공자라는 양반은 이인 편의 첫 장을 이 내용으로 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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