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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20. 2021

근본이 없는 자에게서, 내 무엇을 취할 것이 있겠는가?

八佾편을 一以貫之하는 이 한 마디.

子曰: "居上不寬, 爲禮不敬, 臨喪不哀, 吾何以觀之哉?"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윗자리에 있으면서 너그럽지 않으며, 예를 행함이 공경스럽지 않으며, 초상에 임하여 슬퍼하지 않는다면 내가 무엇으로 그 사람을 관찰하겠는가?"

'八佾편'의 마지막 장인, 이 글은 공자가 말했다는 내용만 삭제한 채, <명심보감(明心寶鑑)> '성심편(省心篇)'에도 그대로 실려 있는 글이다.

주자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을 해석하고 있다.

"윗자리에 있을 적에는 사람을 사랑함을 주장하기 때문에 너그러움을 근본으로 삼는다. 예를 행함에는 경을 근본으로 삼고, 초상에 임해서는 슬픔을 근본으로 삼으나, 이미 그 근본이 없다면 무엇으로 그 행하는 바의 잘잘못을 관찰하겠는가?"

근본, 결국은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무엇이 근본인지에 대해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행위를 통해 설명하고, 그것을 갖추지 못한 자는 볼 것이 없다는 살벌한 확정을 내려버린다.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는 자의 근본은,

다른 사람을 아끼고 그 사람을 위하려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

예의를 갖추는 것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마음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

초상과 장례를 접했을 때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것에 대한 순수한 슬픔이 바탕이어야 한다는 것.


이렇게 세 가지 행위의 근본이 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그 근본을 잃고 근본을 갖추지 못한 자라면, 평가를 위한 관찰조차 필요하지 않다며 역설한다.

볼 것조차 없다는 표현에 다름 아니다.

근본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근본에 힘쓴다는 것은 언뜻 듣기엔 너무도 쉽지만 행하기 참 어려운 문제이다.

하지만, 공자는 늘 강조한 바 있다, 근본이 바로 서지 않으면 다른 그 어떤 무엇을 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고.

그렇게 근본을 강조하고 여러 번 이야기한 것은, 역설적으로 그렇지 못한 자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었다.


'八佾편'은 기본적으로 예악에 대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묶은 편이다.

이 편의 가장 마지막 장에 공자의 이 유명한 말로 마무리를 하는 것은 편 전체의 취지를 아우르는 내용에 다름 아니다.

처음 이 편을 시작할 때 무지한 자들은 의아해한다. 도대체 예약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 장의 바로 전 장이었던 음악으로서 그 정치와 역사를 거슬러 읽는 것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결국 음악은 모든 그 행위와 역사가 지난 이후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그 음악을 통해 거슬러 올라가면 행위의 과정과 그 근본이 되었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하였다.

그래서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 갖추고 있어야 할 근본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수미쌍관으로 일이관지 하고 있는 설명이 바로 이 마지막 장에서 공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취지를 담아내고 있다.

전술한 바 있지만, 30여 년간 72명의 임금을 만나 제대로 된 정치를 펼쳐야 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웠던 공자의 말을 듣고 근본으로 돌아간 자는 결국 없었다.

하지만 이후 생각이 있는 자들은 공자의 말씀과 이후에 책으로 묶인 <논어>를 통해 역사를 통해 스스로를 반성하고 다시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갈 바를 새겼다.

위 사진에서 정리한 한 마디처럼, 공자는 위정자들을 찾아다니며 지적하고 설득하였지만, 그 내용은 그들에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궁극적으로 일깨워주려고 한 것은, 나라를 움직이는 것은 백성이고, 그 백성들이 제대로 된 깨우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고, 위정자는 백성들이 그럴 수 있도록 모범이 되고 이끄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나라를 움직이고 정치를 하는 주체는 위정자가 아니라, 백성이라는 간단하지만 그들이 체득하지 못한 진실을 말한 것이었다.


내가 이 글을 연재하고, 단순히 <논어>를 강독하고 강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자가 행간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여러분의 귀에 대고 소리치는 부분을 부러 마련한 것도, 역시 같은 이유에서이다.

당신들이 깨닫고 당신들이 변화하지 않으면, 결코 이 사회는, 우리 국가는 변화하지 않는다.

이 나라는, 이 사회는 정치로 자신의 배를 불리고 부와 명예를 움켜쥐겠다고 꿈틀거리는 그것들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들이 명확하게 깨닫고 바꿔나가자고 해서 부러 쓴 글이란 말이다.

앞서 강조했던 것처럼 공자가 일깨워주려고 한 내용을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초상이 나서 장례를 치르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내 사랑하는 이가 유명을 달리하셨는데 예를 갖춰 내 사랑과 슬픔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설명의 여지가 없는, 근본중의 근본이다.

본래 정치를 하겠다고 나오는 자들이 모두가 외치는, 이제는 그저 말뿐인 상투 어구가 되어버린 '국민을 위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자리에 올라가는 자들의 영원한 숙제이자, 십자가였어야만 했다.

명절이면 윗사람에게 선물을 하고 인사를 드리는 것은, 공경함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지 나를 잘 봐달라고 내 부와 명예를 위해 나를 간택해달라고 찔러 넣는 뇌물의 의미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근본을 잃은 자는 관찰할 것도 없다는 말은, 근본의 의미조차 깨닫지 못하고 체행하지 못하는 이의 다른 어떤 성과나 다른 어떤 업적을 살펴볼 가치조차 없다는 말이다.


간혹 듣곤 한다.

"인간성은 꽝이지만 일은 잘하잖아."

이런 말도 안 되는 궤변은 공자의 기준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혹자가 근본에 대한 의미를 훼손시킬지도 모르겠다.

회사에서는 인간성이고 인간미 따위는 필요 없고, 그저 성과를 올리는 것이 그 근본이라고 강조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런 참람된 말을 입에 올리는 자가, 정말로 근본이라는 의미를 아는지.

반대로, 인간 된 도리를 해야 한다면서 회사일에 태만하고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면서 근본을 입에 갖다 붙이면서 자신의 일에 태만하고 지 식구들 배를 불려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같잖은 핑계로 이 말을 할지.

내가 아니라고 하지 않더라도 그들 자신이 안다.

그들이 안다고 내가 확신하는 이유는, 그것으로 인해 범법행위까지 가서 처벌을 받게 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그들의 그 말도 안 되는 언행이 지탄을 받을 때, 그들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쪽팔려하기 때문이다.

하긴, 요즘엔 그런 짓거리를 하고서도 끝까지 후안무치하게 당당함을 보이는 무뇌아 수준의 이들도 많이 나오긴 했다.

공자의 말을 빌자면, 그런 인간 이하의 행위를 하는 것들까지 논할 가치는 없다.

팔일편에서 예약을 강조하면서 형식적인 예에 대해 말한 것을 혹시라도 경도되어 이해할까 싶어 공자는 이 장의 말을 잊지 않고 강조하였고, <논어>를 편집했던 제자도 공자의 이 의도를 알았기에 팔일편의 마지막에 이 말을 새겨 넣었다.

형식적인 예악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덕성이, 그 근본이 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요즘 코로나 정국으로 전 세계가 난세를 연출하고 있다.

경제적 위기도 그렇고 현재 코로나 난국도 그렇지만, 결국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에서 시작된다. 결국 인간사회가 겪는 모든 위기는, 신뢰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려면 근원으로 돌아가 믿음부터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해서 몇 백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그것을 깨닫고 체행하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이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들이라는 사실이다.



8월 말일이면 이제 브런치를 시작한 지 석 달이 됩니다.

주말을 제외하고, <논어 풀어 읽기>로 논어를 매일같이 연재하여 이제 20편 중에서 3편이 끝이 났습니다.

벌써 진도가 10%를 넘었다는 뜻이지요. ^^*

수많은 독자들은 아니지만, 매일같이 라이킷을 눌러주시며 자신이 공부하였다고 출석부에 도장을 꾸욱 찍고 가는 분들부터, 라이킷 출석도장은 아니지만, 조용히 자기 공부를 해나가시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서툰 글이라 부끄러운 맘이 적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달려보고자 합니다.

2500여 년 전의 공자의 가르침이 지금의 시대에 일깨움을 주는 것이 점점 더 커져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글로 함께 공부하는 동학들이 근본으로 돌아가 이 사회를 올바르게 변화시키게 될 그날이 오게 될 거라 믿으며 연재를 계속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시고, 월요일부터 里仁篇으로 다시 만나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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