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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19. 2021

훌륭한 일을 했다 하더라도 과정이 어떠한지를 살핀다

'아름답다.'라는 의미는, 그저 '예쁘다.'로 완성되지 않는다.

子謂「韶」: "盡美矣! 又盡善也!" 謂「武」: "盡美矣! 未盡善也!"
공자께서 「소」를 평하시되,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좋다." 하셨으며,「무」를 평하시되, "지극히 아름답지만 지극히 좋지는 못하다."라고 하셨다.
신영복 선생은 이 장의 뜻을 이렇게 풀이하였다.

이 장에 대한 주자의 해설은 이러하다.


韶는 舜임금의 음악이고, 武는 武王의 음악이다.

美라는 것은 소리와 모양의 성대함이고, 善이라는 것은, 아름다움의 실제 내용이다.

舜임금은 堯임금을 이어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였고, 武王은 紂王을 정벌하여 백성을 구제하였으니, 그 공은 똑같다. 그러므로 그 음악이 모두 지극히 아름답다.
그러나, 舜임금의 덕은 천성대로 한 것이요, 또 揖하고 사양함으로써 천하를 얻었고, 武王의 덕은 되찾은 것이요, 또 정벌하고 주살함으로써 천하를 얻었으므로, 그 내실에서 같지 않음이 있는 것이다.



두 임금은 새로운 왕조를 이룬 공이 같다. 하지만 과정이 다르다기 때문에 그들 왕조의 음악이 갖는 격이 다르다고 엄격하게 평가하고 있는 내용이다.

舜임금은 이전 임금에게 양위하는 과정이 순조로웠고, 이전 왕조가 훌륭했기 때문에 그대로 계승하여 훌륭한 정치를 폈다. 반면,  武王은 이전 왕조가 올바르게 정치를 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혁명이라는 선택을 하여 정벌을 통해 새로운 왕조를 펴고 훌륭한 정치를 했다.

정자가 주석에서 '정벌함은 그 하고자 해서가 아니요, 만난 시대가 그러했기 때문이다.'라고 武王을 변호한 것은 바로, 공자의 엄격한 평가방식에 대해,  武王이 스스로 택한 것도 아닌 상황상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에도 그렇게까지 엄격하게 평가할 것은 아니지 않냐는 볼멘소리에 해당한다.

무왕의 초상화

내가 생각하건대, 두 사람의 생각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공자가 다소 빡빡하게 기준을 삼은 것은, 평가의 대상으로 삼은 이들이 전범이 될만한 그릇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공자는 아예 함량 미달인 자에 대해서는 평가자체를 거부한다. 언급을 회피하고 잘 모르겠다고 백안시해버린다. 그런 그가 굳이 그 왕조의 음악을 통해 그들의 과정까지 들여다본 것은 이전장에서 살펴보았던 음악을 통해 그 사람을 읽어내는 수준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실제로 공자는 소악을 듣고는 석 달 동안 고기의 맛을 잊을 정도로 심취했었다고 문헌에 전한다. 단지 그 음악이 너무 감미롭다고 그 맛난 고기 맛을 잊을 리가 없다. 그는 음악을 통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舜임금의 펼치고자 했던 성정을 읽어내고 그것에 감복하고 다시 곱씹으며 석 달간 빠져 지냈던 것이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목표만 달성할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요즘 세태에 비하면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는 의견이자, 정자의 볼멘소리를 듣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폭정을 행하는 자를 주벌하고 왕조를 세운 것조차 온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하는 대목이 좀(?) 빡빡한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 공자가 왜 그렇게 강조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만일 성군에 해당하는 무왕의 정벌이 정당화가 된다면, 대의명분이랍시고 섬겨야 할 왕이 조금 잘못한 구석이 있거나 그렇게 꾸며낼 여지만 있다면 언제든 혁명이 가능하다는 논리도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공자는, 어쩔 수 없이 혁명을 감행해야만 했던 무왕을 핑계로 자신들의 혁명에 토씨를 달 역모를 꿈꾸는 사특한 자들을 경계하고자 한 것이었다.

공자의 가르침은 늘 그렇듯이 아주 작은 저 밑의 것을 들어 일깨우는 방식이 아니다.

순임금의 동상

결국 미는 이룬 결과를 말하고, 선은 그 동기와 과정을 말한다. 때문에 공자가 말하는 아름다움의 근본은 선이다. 선이 없는 아름다움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선은 개념상으로 너무도 당연하지만, 결코 악에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공자는 완벽한 아름다움이란 결국 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논리구조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발버둥 쳤던 많은 이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직접 목도한 바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감옥에 다녀왔거나 현재 감옥에 있다.

일제 식민지 치하의 독립투사가 아닌 이상, 그들이 아무리 목에 핏대를 세우고 항변해봐야, 법률에 어긋난 범죄행위를 했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위 장에 입각해서 보면 그들은 입이 열개라고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몇 년간의 대통령 자리를 위해 그런 범죄행위를 과감하게 저지르고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었을까?

내가 보기에는 없어 보인다.

그들은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다.'라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지낼 것으로 보인다.

공자가 찬 물을 몇 바가지나 들이부으면서 정신 차리라고 위 장에서 말한 것은, 그런 자들 때문이다.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아니, 그렇게 해서라도 부와 명예와 권력을 잡을 수 있다면 성공한 거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 썩어빠진 사고방식을 가진 그들과 그들을 부러워하는 정신 나간 이들에게 그래서는 안된다고 일갈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왜 대통령을 예로 들었는지 의아한가?

감옥에 갔던 역대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이니 같이 손가락질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동조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위 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공자가 훌륭한 일을 한 두 임금을 그 빡빡한 잣대를 기준으로 설명한 이유는, 내가 지금 대통령이 되려고 범죄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른 그들로 반례를 든 것과 같은 의도이다.


정신을 차려할 것은, 감옥에 갔다 왔거나 들어가 앉아 있으면서도 정신 차리지 못하는 그들이 아니다.

바로 당신들이란 말이다.

결과만 좋으면,

내가 위로 올라갈 수만 있다면,

성공할 수만 있다면,

이따위 말도 안 되는 대의명분이랍시고 설정하고는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적당히 불의와 타협하고

세상을 악으로 물들게 하면서

세상은 백색이 없고 회색만 있다며 개똥철학을 내뱉는 당신들 문제라고 수천 년 전부터 공자가 남극에서 깬 얼음을 한 가득 넣은 물 바가지를 당신의 정수리에 내리 붓고 있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단 말인가?

선은 선일뿐, 악과는 배치된 개념이라는 것쯤은

이제 알 때도 되지 않았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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