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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10. 2021

대만에 사는 악녀 - 3

친한파를 가장한 대만 친일파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31


  나중에 그의 정체를 파악하고 난 뒤에 이렇게 표현하는 것 자체도 그에게 사치고 사기라고 생각했지만, 표면상으로 그의 프로필을 보자면, 그는 ‘기자’ 출신이었다. 1954년생이니 올해로 환갑을 훌쩍 넘은 60대 중반의 중늙은이였다. 그가 주로 직접 글을 올리는 인터넷상의 프로필을 보면, 외교대학교 한국어학과 출신이었고,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동아시아연구원에서 석사를 했다고 적혀있다. 85년부터 88년까지 대만 연합보(聯合報)의 한국 특파원이었다. 이후 대만 <타이베이 타임즈>의 편집장을 거쳐 CTS-TV 부사장을 한 게 그의 공식적인 직함의 전부였다.

  물론 그는 한국에서 열리는 비공식 세미나나 정치색을 띤 모임 등에 초청되었을 때, 자신을 아주 당당하게 ‘외교대학교 교수’라고 소개하곤 했다. 하지만 명확한 팩트를 확인하자면, 그것은 명백한 사기행위였다. 학생들이 학내에서 강사에게 ‘교수님’이라고 그냥 부르는 잘못된 관행은 있을지언정, 외부에 그것도 해외에서 불려 간 세미나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강사를 교수라고 부르는 것은 명백한 사기행위였다. 그는 교수라는 타이틀을 그의 평생에 단 한 번도 달아본 적이 없었다. 그는 방송국에서 잘리고 나온 10여 년 전에 자신의 모교라는 이유와 정치적인 동지들이 여럿 있다는 이유로 외교대학교에 빌붙어 한국어학과 강사를 하고 있을 뿐이고, 어디에 있는 단체인지 알 수 없고, 실제로 현재에는 실체도 없어졌다고 하는 ‘지한원’의 원장 혹은 CEO라고 스스로 명함을 파고 이름을 팔고 다닐 뿐인 말 그대로 자기 연구실조차 없는 보따리 장사였다.

  그나마 한국에 기사를 송고하고 있는 통신원이라는 애매모호한 내가 한국대표부의 행사나 한국 관련 행사에 초대되어 취재랍시고 나갈 일이 있을 때면, 머리가 백발에 대머리가 슬쩍 벗어진 주영희의 모습이 늘 눈에 띄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던 행사도 한국대표부에서 주관하는 공식행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의 나서고 싶어 하는 특유의 행동과 튀고 싶어 하는 독특한 옷차림은 상당히 도드라졌다. 그것은 실력이 아닌 관계를 강조하거나 어떻게든 튀어서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어 하는 나름 그만의 전략인 듯했다. 한 마디로 그는 늘 대표나 다른 사람들과의 친근한 관계를 뻐기고 싶어 하는 권력지향적 성향이 도드라지는 지극히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그다지 그와 인연이 없었던 내가 그에게 다소 삐딱한 시선을 갖게 된 이유는 올해 초 중앙일보에 대서특필되면서 폭로된 한 기사 때문이었다. 머리기사 자체가 「대만의 한국 전문가 "위안부 문제는 유족이 병원에 관 메고 가서 떼쓰는 격"」이었다. 일본 우익 언론지에 일본어로 작성되어 게재되었던 그 기사를 발굴해서 한국어로 정성 들여 번역하여 공개를 한 기자의 목적이, 친한파를 가장한 친일행각을 하는 그의 본모습을 폭로하려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혼란한 정국을 틈타 정말로 한국을 비난하는 주영희를 띄워주고자 해서였는지 기사만으로는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 기사에 대한 언론인과 일반인들의 반응은 기사 제목에서처럼 ‘대만의 한국 전문가’를 가장한 친일파의 추악한 본모습 그 자체였다.

  장문의 그 기고 글 하나만 보더라도, 그가 가지고 있는 사상과 그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입장에 대해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한국인은 전후(戰後),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역사를 조작해 왔는데 오히려 일본이 역사를 조작했다고 비판하고 있다.’라는 식으로 한국이 역사를 조작하고 있다는 식의 비난에서부터 시작해서, 더 심하게는 근거 없이 한국 자체가 신용이 없는 나라라서 대만에 한국의 은행이 없다는 황당한 궤변까지 펴고 있다. 실제 원문은 아래와 같다.     



요 근래 나는 대만 각지에서 ‘한국을 알자’는 주제의 순회강연을 다니고 있는데 종종 청중으로부터 ‘한국인은 신뢰할 수 없다’는 점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나는 이에 대해 언제나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하곤 한다. 세계 각국의 은행은 다들 대만에 지점을 개설하고 있는데, 한국의 은행들만 거의 개설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신용’은 은행의 가장 중요한 목숨 같은 것이어서 신용이 없는 은행에 돈을 맡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대만에 산 지 10년이 넘어가는 내 입장에서 봐도, 대만은 굳이 한국의 은행이 나와서 영업을 할 정도의 시장규모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느 언론사에서도 대만의 특파원을 내보내지 않는다. 중국의 특파원이 모두 커버한다. 대만은 국가차원에서도 그렇지만 굳이 중국의 의견을 따르지 않더라도 한 국가로서의 규모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더더구나 최근 10년간 급격히 동남아 이하로 국가경쟁력에서 떨어져 금융가에서나 국제경제 논리로도 판을 벌일만한 시장이 아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런 감정적인 논리로 글을 써젰겼다.    

나는 전후 50년, 60년, 70년이 지나도 한국인은 왜 ‘반일’을 계속하며 위안부 문제를 항의하는 건지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종전 70주년, 또 일ㆍ한 국교회복 50주년을 맞은 2015년 이후, 양국 관계는 위안부 문제로 오히려 최악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시진핑 주석과 함께 열병하는 모습을 보고 마침내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원래 위안부 문제는 중국과 공유하는 게 가능한 주제이고 나아가 ‘중국과 손잡고 반일’을 하기 위한 절호의 소재였다.    

  사실, 위의 글 자체도 논리도 박약하고 허술하기 그지없지만, 이성적인 분석 이전에 이 내용은 나를 가장 열 받게 하는 부분이었다. 그는 한국의 반일감정을 수십 년 동안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면서 그 근거를 중국에 사대주의를 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 반일이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아무런 근거도 없이 펼쳐댔다. 일본의 적군파나 친일파들이 보면 너무도 반가워할 내용으로 알알이 박아 그들의 입맛에 맞춰 쓴 것인데, 사실 이제까지 그가 쓴 쓰레기 같은 잡글을 찾아보면 그의 사상 자체가 이 기고글에 집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이미 이런 생각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중국에 붙어먹기 위해 그들과 공유하는 감정으로 꽉 쥐고 있다는 식의 논리는 그야말로 황당무계이고 공분을 사기에 충분한 모함이었다. 그는 결국 그 나쁜 머리로 쥐어짜 내어 이런 비유로 한국의 행동을 비난하고 일본에 꼬리를 흔든다.    


한국의 이런 방식은 대만인이 쓰는 ‘태관 항의(관을 메고 항의)’와 같다. 예를 들어 의료사고로 사망한 환자의 유족이 관을 메고 병원에 가서 항의한다. 도를 넘은 항의에 병원 측은 합리적인 이유가 있더라도 배상을 하고 만다. 사고가 왜 일어났는지, 재발 방지는 어떻게 하면 좋은지 등의 앞으로 이어질 대책은 묻힌 채, 피해자 측이 배상을 받고 끝나버린다는 의미다.

… 중략…

다만, 대만인이 관을 메는 건 보통 한 번뿐이다. 만약 장기간 관을 다른 사람 집 앞에 놔두면 그런 과격한 항의 방식은 이웃의 불만을 불러온다. 위안부상(像)이 한국 전체의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킨 것은 어떤 외국인이든 제삼자의 입장에서 ‘너무하다’고 느낄 것이다.    



  만약 일본의 정신 나간 우익 중 한 사람이나 그들에게 스폰을 받고 있는 한국의 정신 나간 친일파가 이런 글을 썼다면 그다지 내가 흥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만에서 스스로 방송에 노출되려고 난리를 피우며 나대는 친한파를 표방하는 이 인간이 일본에서 스폰을 받으며 몰래 썼던 이 기고글이 하루 만에 한국의 중앙지에 폭로되었던 것이다. 그는 한국대표부와의 친분을 자랑하며 적지 않은 지원과 지원금을 받았었고 친한파라는 것을 강조하며 5.18과 4.3 사태가 대만의 민주화와 비슷하다는 식으로 자신이 한국 전문가인 것처럼 포장하며 각종 재단의 지원금을 받아왔다. 나중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그 사건으로 인해 그는 (아직도 이 엄청난 친일 기고 사건의 진상을 확인하지 못한) 제주도 4.3 재단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지원이 끊겼다고 했다. 그래서 2월에 시작하는 자신의 외교대학교 강의에 ‘한국인은 내 강의에 얼씬도 하지 말라.’라고 종주먹질을 하며 소리를 높였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들려왔다.

  생뚱맞았던 것은 그런 그가 박 교수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사건의 장본인양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는 전문가이자 고발인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사실 그에 대한 프로필 이외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한국에서 태어난 화교 출신으로 단교가 되기 전에 한국의 대만대표부에서 외교관을 지냈던 사람에게 들었던 사실이나 알고 지내던 대만 기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들 중에는 이 보다 더 충격적인 것들도 많았다.

  무엇보다 직접 대화를 나눠보고 옆에서 들은 사실부터 검증하자면, 무엇보다 그의 한국어 실력이 너무도 형편없었다. 발음이 이상한 것이야 태생적으로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유창하다고 영혼 없는 칭찬을 하기에도 거리가 너무 먼 한국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그가 외교대학교 한국어학과 출신이라는 점이 현재의 그를 있게 했다는 점에서 나에게 있어서는 그를 판단하는 일종의 기준 잣대가 되었다. 기자 흉내를 내고 있는 내 입장에서 중국어를 전공하지 않고서 여기서 나오는 기사들을 취득하고 분석하는데 내 중국어 능력이 얼마나 큰 수준 차이를 만드는지 충분히 경험해왔고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의 한국어 실력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한국어 정보들을 취득하고 제대로 분석해내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할 능력이라는 점 때문이다. 내가 직접 짧지 않은 시간에 걸쳐 그와 대화를 나눠보고 그가 쓴 책이라던가 글을 보면서 내린 결론은 그의 수준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허접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에 대한 십수 년간 80년대 한국의 특파원 시절부터 그를 지켜보았다는 외교관 출신의 화교 아저씨에게 들은 내용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사실 그놈은 카메라 알바 출신이었어. 외교대학교 한국어과 다니던 시절부터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이것저것 사진을 찍어서 신문사에 넘겼던 것으로 <연합보(聯合報)>에 들어간 것이지,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가 아니었어. 한국에 파견되게 된 것도 한국어과라는 이유로 들어가게 된 것이지, 제대로 된 기사 작성이나 사건을 분석하는 트레이닝을 받은 녀석이 아니었어. 우연히 한국에 갔다가 이웅평이가 83년에 미그기를 타고 내려온 것을 기사로 보낸 것이 대박이 나서 기자로 채용이 된 거지. 그때 연합보 사장이 잘했다고 만 달러를 포상금으로 내려주기까지 했어. 그런데 한국에 있을 때부터도 그놈은 한국에 결코 우호적인 놈이 아니었어. 그냥 기자들이 갖는 기본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한국인에 대해서 상당히 삐딱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녀석이었어. 한 번은 지방 의대에 재학 중이던 여자 화교애가 방송국 시나리오에서 대상을 받았는데, 그 작품이 대만의 경요라는 유명 소설가의 이야기를 표절한 것이라면서 방송국에 가서 난리를 쳐서 결국 그 여자애의 수상을 취소하네마네 소송을 하네, 현상금을 다시 받아내야 한다는 둥 아주 가관이 아니었거든. 나를 비롯해서 한국에서 특파원 입네하고 떠들고 다니던 그놈을 아는 사람들 중에서 그놈을 좋게 보는 사람이 거의 없어.”

  연배가 좀 위인 동시대를 한국에서 보냈던 그가 기억하는 주영희는 그렇고 그런 삶을 살아온 인물에 지나지 않은 정도를 넘어선 다소 악의적인 성향이 강한 혐한파였다. 한국이 대만과 단교하기 직전에 대만으로 돌아온 그의 이후 행보에 대해서는 다른 대만 노년 기자와의 술자리에서 얻어 들을 수 있었다.

 “사실 그 사람은 기자는 고사하고 언론인이라기보다는 정치인들 주변에서 뭔가 콩고물 떨어지면 한 자리해볼까 하는 전형적인 기레기예요. 2000년 즈음에는 정치인들한테 들러붙어서는 자기가 한국통이니까 주한 타이베이 대표부의 대표로 보내달라는 얼토당토 하지 않은 로비까지 펼치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 이유라고 제시했던 것도, 무슨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어를 유창하게 잘하는 것도 아닌 걸 다들 아니까, 자기가 한국의 다양한 정치인들과 끈이 연결되어 있다는 식의 애매모호한 논리였거든요. 내가 유명한 누구랑 형 동생 하는 사이라는 둥 누구랑 아주 친해서 맨날 같이 술 먹고 오입질까지 같이 하고 다닌 사이라는 둥.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인물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올라갈 수 있었느냐고 의아하겠지만 타이완은 인력풀이 그렇게 풍부한 편이 아니거든요. 실제로 능력 있는 언론인들은 애초에 중국 대륙 쪽으로 진출했고요. 심지어 최근에 정권 바뀌고 나서 국정운영을 해야 하는데 인물이 너무 없어서 다른 당에서 인물을 빌려와야 하는 일까지 터지는 나라니까요. 그러니까 주영희 같은 놈이 그런 얼토당토 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거죠. 최종적으로는 방송국 부사장까지 하던 시절에 온갖 로비에도 비롯하고 결국 사장까지 올라가는 게 실패하게 되자 그에 대한 앙심을 품고는, 국민당이던 자신의 정치 태생을 뒤집고 민진당에 들러붙었어요. 한국에 비해 대만은 정치적인 색깔을 모두 가지고 있거든요. 신문사든, 심지어 대학교수들까지도요. 국민당과 민진당의 당색이 일반인들에게도 상당히 명확하게 갈려서 드러나는 거지요.”

  그가 대놓고 주한 타이베이 대표부의 대표로 가겠다고 자청할 정도로 대만 정부가 엉성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인 것인지 주한 타이베이 대표부가 한국에 있는지, 왜 대사관이 아니고 대표부인지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시대에 누가 대표를 하던 한국 국민의 입장에서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놈이 한국에 다시 뭔가 감투를 써서 왔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냄새나는 안 좋을 짓을 하고 다녔을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것은 그가 당적을 바꿔가며 정치판에 기웃거렸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민진당을 지지하는 노 기자는 야당 시절부터 민진당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민진당에 빌붙어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으려는 주영희가 너무 역겹다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놈이 당시에는 국민당에 뼈를 묻을 것처럼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고 지 전성기라고 말할만한 시기를 보내 놓고서는 국민당이 별 볼 일 없어질 즈음에 다시 민진당쪽에 붙었다는 거예요. 사실 그놈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방송국 사장이 되는 꿈이 박살이 났는데, 타고 있던 국민당이 기울고 민진당이 뜨고 있으니 국민당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었겠지요. 그렇게나 방송국 사장이 되고 싶었는데 능력이 안 된다고 단칼에 밀려나고 보니 칼을 간 거지요. 게다가 부사장직을 하도록 놔두지도 않고 그대로 잘렸으니 더욱더 앙심을 품게 된 거고요.”

  그런 그는 민진당 쪽으로 옮기면서 곧바로 국민당 저격수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특히 그는 갑작스레 ‘대만은 대만이지 중국이 아니다.’라는 민진당이 캐치프레이즈를 확실하게 노선으로 잡고 있었다. 그래서 방송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입법위원들과 늘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고 있던 천태비가 이번에 일이 터지면서 가장 먼저 전면에 나서 기자회견까지 연 것이었다.

  가뜩이나 한국에서 떨어지던 콩고물이 2017년 2월 9일 기사가 게재되던 날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단번에 끊긴 것도 모자라, 대만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이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한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자신의 강의실에 한국인과 개는 들어오지 말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던 터였다.

  그러면서 지내던 바로 그다음 주에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서울대 출신의 교수가 부임해왔고, 자신은 그렇게 교수를 시켜달라고 해도 할 수 없었는데, 버젓이 강의를 한다고 부임한 교수가 싫었을 터였다.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도 거슬리던 판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도움을 청하니 여학생의 도움 요청은 어찌 보면 그에게는 정치판과 방송판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주가를 올릴 수 있는 계기였다.

  이 좋은 이벤트를 마다할 천태비가 아니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내가 이 모든 판을 이해하고 나서 소름이 돋았던 것은 이제 갓 24살이 된 외교대학교 여학생이었다.

  박 교수의 기자회견이 있던 날, 받은 학과장의 어이가 없는 협박 전화부터 성평회 조사위원회의 조사 과정 등등 그는 나의 조언을 따라 모든 대화와 통화를 녹취하는 치밀함을 잊지 않았다. 내가 대만에 10년 넘게 살며 피부로 겪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는 하나였다.

  “모든 대화와 통화를 녹취해두고 증거를 남겨두세요. 바로 눈앞에서 한 얘기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일 없다고 부정하는 얘들이에요. 모든 것을 증거로 남겨주세요.”

  박 교수가 남겨둔 모든 기록을 그의 아내에게 받고 나서 그것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다시는 이런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가장 크다. 아울러 이렇게 명확한 기록이 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덮으려고 하는 대만의 쓰레기 언론, 검찰, 법원, 교육부 그리고 국립대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가 왜 점차 동남아 빈민국 수준으로 저하되어 가는지에 대한 분석에 다름 아니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무엇보다 쓰레기 같은 짓을 한 이 나라의 부패한 것들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외교부, 국회의원, 언론들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이 기록을 통해 남겨두고자 한다.


-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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