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Oct 16. 2021

대만에 사는 악녀 - 29

1차 단과대학 교평회의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355



                  1차 단과대학 교평회의

                                              2017년 8월 22일 오후

                                              외국어대학 101 강의실

 

변호사를 고용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변호사를 동석하고 회의에 참석할 수 있어서 박 교수는 이전의 상황보다는 나아졌다고 자위했다. 다만, 하필이면 아내의 생일날 이런 거지 같은 누명에 대해 해명하러 변호사를 만나고 있다는 것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남의 나라까지 와서 가족들끼리 모처럼의 단란한 생일파티를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고사하고, 같잖은 쓰레기들이 모인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연구실을 나서는 모습을 아내에게 보여주는 것 자체가 너무나 죄스러웠다.

“아참! 그 라인에 했던 모든 것이 다 문제가 심각하다는 말이 무슨 뜻이었어요?”

막 함께 이동하면서 박 교수가 황변호사에게 물었다.

“아, 일단 지금은 회의에 집중하고 끝나고 나서 얘기를 나누기로 하죠.”

나이는 어렸지만 나름 진중한 태도를 보이는 황 변호사는 나름 전의를 다지는 듯해 보였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1층에서 만난 황 변호사와 걸어 올라간 언덕의 외국어대학 단과대에 도착하자 단과대 학장실 옆의 사무실에 멀뚱하니 30여분을 앉혀 두었다. 다시 시작된 그들의 점심시간. 그들의 방식은 늘 똑같다고 박 교수는 생각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한참을 지나서야 1층에 있는 넓은 강의실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들은 회의를 빙자해서 직원들까지 도시락을 공금으로 시켜서 사 먹을 수 있는 날 정도로 회의날을 여기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도시락을 허겁지겁 아직도 먹고 있는 교수부터 회의비용으로 차려진 듯 커피와 간단한 다과 간식들까지 허겁지겁 입에 욱여넣는 나이 든 교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온통 역한 기름기 가득한 음식 냄새가 온 회의실에 진동했다.

“아, 같이 오신 분은 변호사신가요?

“네. 제 이름은 황진성입니다. 박 교수님의 변호사입니다.”

황 변호사가 40도를 웃도는 더위에 택시에서부터 내려 언덕배기를 오르느라 연신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거둬내며 자리에 앉았다. 같이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자, 같은 단과대학이라 그런지 연구대루 연구실의 같은 층에서 마주쳤던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절반 이상이 늙은 여자 교수들이라는 점이었다. 외국어대학의 특성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다들 순해 보이는 눈매는 결코 아니었다.

“문건을 미리 제출하셨던데 굳이 뭐 따로 보충하실 것이 있다면 하시던가요.”

위원장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가 단과대 학장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짜리 몽땅한 키와 다부진 눈매의 독해 보이는 표정으로 봐서 아마도 정치욕이 강한, 뭔가 한 자리 원해서 눈이 뻘게져있는 권력지향형의 여자 중에 하나이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여자였다. 워낙 대만 여자들 중이 그런 스타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새삼 특이할 것도 없다 생각했다. 박 교수가 조심스럽게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제 중국어 실력이 그다지 훌륭하지 못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구두로 설명하기보다는, 사전에 일단 2장짜리 저의 입장을 밝히는 문건을 제출하였습니다. 이 문건을 이 자리에서라도 간단하게 읽어주시고 판단하시는 데 참고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서 그제야 종이를 끄적이며 꺼내는 흉내를 하는 교수들은 그나마 그들 중에서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박 교수의 진술서는 판단의 중요한 자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하게 만드는 행동에 다름 아니었다. 박 교수의 말이 끝나자 바로 황 변호사가 나섰다.

“안녕하세요. 저는 박 교수님의 변호인입니다. 그럼, 제가 법률적인 사안에 대해 심각한 문제점들이 있어 먼저 조금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문제로 지적할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평회에서 작성한 조사보고서를 당사자에게 제공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성평회 관련 법령의 25조에는, 당사자에게 조사보고서를 서면상으로 제공해야만 한다고 분명히 적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평회에서는 우리에게 조사보고서 제공을 거부하고 기만한 채 회의를 진행하는 불법을 자행하였습니다. 이는 국립 외교대학교 성평회 방지 규정에도 어긋나 있다는 것입니다. 명백한 불법이라고 할 것입니다. 합법적이지 않은 경우에는 우리 측에서는 그 과정이나 결과, 어느 것 하나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밝혀두는 바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서 논하자면, 그 조사보고서의 조사방법과 내용에 대해서, 서면 이외의 어떤 증거도 제시하고 있지 않는다는 겁니다. 조사보고서의 내용과 작성 과정 모두 의문투성이입니다. 도저히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세 번째는, 이 사안에 대해서는 이미 사법절차가 진행 중이라는 점입니다. 검찰관(검사)도 이 부분에 대해 기소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조사 날짜를 다시 조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법절차의 결과가 나온 다음에 행정절차도 그 결과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고 봅니다.”

변호사의 법률적 지적에는 위원장 여자를 비롯해서 몇몇이 귀를 쫑긋하고 경청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러한 자세도 그저 자기들의 본래 취하는 방어적인 자세에 지나지 않을 뿐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놀라는 듯한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밖에도 이상한 점을 들자면, 성희롱 행위에 대해서 많은 학생들이 공공장소에서 봤다고 합니다. 언론을 통해서 이런 식의 카더라 뒤집어씌우기를 시도하고 있는데, 실제로 조사보고서에도 이런 내용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두 번째, 마치 간접적으로 다른 학생들이 성희롱 행위를 하는 것을 봤다는 식으로 조사보고서에서 무책임하게 언급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만약 정말로 박 교수님이 성희롱을 한 것이 맞다면, 목격했다고 하는 학생들이 연구실 안에서 그런 행위를 한 것을 보고 듣고 한 것이 있어야 증거력을 갖는다 할 것인데, 그 문제의 여학생이 성희롱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당시에 연구실에 함께 있었던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굉장히 의문이 가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 번째로 정말로 성희롱 행위가 있었다면 일반적으로 학생은 박 교수님에 대한 악감정이나 싫어하는 감정을 분명히 했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 25일 교수님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한국 요리를 해서 먹고 어울리는 자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번에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나서 형사고발까지 했던 그 학생들 모두가 그 자리에 함께 참석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의 이 고발이, 굉장히 자의적으로, 또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뒤집어씌운 누명이라는 사실을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박 교수님은 이제 대만에 온 지 넉 달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국 최고의 명문대 출신으로 이곳에 와서 학생들을 위해 개인적인 시간을 할애하는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학생들에게 열성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이제 그 문화에 적응하는데 굉장히 어려움을 겪었을 외국인 교수에게 이런 식으로 누명을 씌우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이상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굳이 경청할 가치가 없다는 듯이 여자 위원장이 드라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더 뭐 보충할 내용 같은 거 있습니까? 없으면 나가도 좋습니다.”

그렇게 할 말이 더 없냐고 확인하고 나서는 질문이나 다른 사실의 확인 같은 절차도 없이 그들은 얼른 두 사람을 내쫓고 형식뿐인 투표절차에 들어갔다. 박 교수와 황 변호사가 회의에 참석해서 다시 쫓겨나는데 걸린 시간은 채 7분이 되지 않았다.



 

성평회에 조사보고서와 증거 요청하러 가다.

                                              2017년 8월 22일 오후

                            단과대 교평회 참가 직후 행정대루

 

 

7분 만에 회의실에서 나와, 뜨거운 40도 가까운 땡볕을 등에 맞으며 박 교수는 황 변호사와 함께 행정대루로 향했다. 교평회에 참가한 후 바로 다른 일이 있다면서 박 교수에게서 벗어나 사무실로 돌아가려는 황 변호사를 억지로 설득해서 함께 나선 길이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방금 전 진행되었던 교평회의 직전에 찔끔 보여주고 말았던 성평회의 조사보고서가 일방적으로 편파적인 내용만 담고 있다는 사실을 박교수가 그제야 확인을 했기 때문이었다.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그런 내용이었기에 학과 회의에서는 그 보고서 자체에 대한 절대 언급을 하지 않았던 것이고, 단과대 교평회에서는 의도적으로 미리 제공하지 않고 회의 직전에 찔끔하며 5분간 그들이 밥 먹는 동안 살펴보라고 변호사에게 마지못해 보여준 것이었다.

박 교수의 생각대로라면 그나마도 학과 회의까지는 변호사가 동석하여 선임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충 뭉개려고 하다가 변호사가 참석한다는 사실을 공지받고 절차상의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최대한 학교에서 요식행위로 ‘현장 열람’만을 허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나름의 근거도 있었다. 그들은 회의 상의 통역을 요구하는 박 교수에게 통역을 제공할 수 없다고 당당하게 버텼다. 심지어 한국어학과장이 참여하니 통역을 해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둘러댔는데, 오늘 회의에서 한국어 학과장은 다른 교수의 머리통 뒤에 숨어 박 교수와 시선을 마주치는 것조차도 꺼렸다. 아마도 그에게 조금이나 찌끄럭지처럼 남아 있을 일말의 양심 때문이거나 새가슴인 그의 천성 때문이라고 박 교수는 생각했다.

 

행정대루의 성평회 사무실은 따로 있지 않고 부학장실의 한 켠에 유일한 여직원이 책상 하나를 두고 머리 위로 푯말에 ‘성평회’라고 적혀 있을 뿐이었다. 전에 회의 때문에 한 번 와 본 적이 있는 박 교수가 그녀를 바로 발견했다.

씨 성을 가진 그 여자 직원은 외교대학교의 성평회에서만 6년째 근무하고 있다고 자기를 소개한 바 있는 40대 초반의 여자였다. 그녀는 전화를 하고 있다가 박 교수의 등장에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으며 나가라는 듯이 시늉을 했다. 언뜻 전화의 내용이 지금 막 회의를 마친 단과대학교 행정실의 학과장 혹은 그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해 보였다. 그녀가 훼훼 젓는 손짓을 보며 황 변호사가 다시 사무실의 앞쪽으로 돌아나가 그녀가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

“무슨 일이시죠? 이렇게 약속도 없이 쳐들어오는 식으로 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녀는 두 남자를 밀 듯이 문 쪽으로 나가라고 표시하며 안면이 있던 박 교수에게는 놀란 시선을, 이제는 처음 보는 황 변호사에게 불쾌하다는 듯한 황당한 시선을 던졌다.

“네. 저는 박 교수님 담당 변호사입니다.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니, 왜 뜬금없이 당신은 화를 냅니까? 우리가 못 올 곳이라도 왔습니까?”

그녀의 예의 없는 대꾸에 박 교수가 먼저 짜증을 냈다. 일종의 선전포고이고 기선제압이었다.

“여기서 떠드시면 어떻게 해요? 부총장실이 바로 옆인데...일단 저쪽 공간이 있으니 따라오세요.”

그녀는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들으면 안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 사람을 이끌고 빈 휴게공간으로 데리고 갔다. 일전에 조사위원회에 조사를 받으러 박 교수를 대기시켰던 창고 같은 공간이었다.

“앉으시지요. 지금 단과대 교평회의에 참석하고 오는 거 아니에요?”

“네. 이제 막 회의 끝나고 내려오는 길입니다.”

“그런데요?”

“우리 측에서 보기에 과정상의 문제에 대해 항의 의견을 표시하기 위해서 당신을 찾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갑자기 나한테 쳐들어오듯이 찾아오면 안 되지요.”

“뭐가 갑자기입니까? 지금 회의를 참석했는데 그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견되었으면 당연히 성평회의 유일한 직원인 당신을 찾아와야지요.”

박 교수의 단도직입적인 공격에는 익숙해졌다고 느낀 그녀였지만, 역시 매번 눈앞에 대하고 보면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팩트 공격에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린 부분도 없었기에 뭐라고 당당히 따지기도 뭐했다.

“저는 성평회의 전체적인 과정을 처리, 담당하는 담당자일 뿐이라구요. 저는 과정 진행을 담당할 뿐이고, 뭔가 답변할 수 있거나 그럴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가 왜 왔는지 아직 말하지도 않았고, 뭔가 묻겠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아무 영문도 모르면서 다짜고짜 그렇게 말할 필요가 있나요? 우리가 이렇게 온 이유는 다른 거 없습니다. 위원회에서 작성된 문제의 조사보고서와 학교 측에 내가 먼저 요청했던 CCTV에 대한 영상을 정식으로 제공 요청하기 위해 왔습니다.”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말하자 그녀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상치 못한 요구인 듯 보였다.


다음 편에 계속...

이전 08화 대만에 사는 악녀 - 28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