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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14. 2021

천재 아인슈타인의 실패

천재는, 다만 후대에 의해 만들어질 뿐이다.

'천재'라는 키워드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대답하는 인물 중의 한 명인,

Albert Einstein

그의 인생을 찬찬히 복기하다 보면 '천재'라는 말은 대중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괴짜였기는 하였나 보다.

예컨대, 자신의 노벨상 상금으로 주식 투자를 해서 몽땅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라던가,

한때 카지노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많은 정성을 들였지만 결국 돈을 날리고 나서


"카지노에서 돈을 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딜러의 칩을 훔치는 것뿐이다."


라는 말을 했다는 것을 보면.


그에게 실패가 있었느냐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의 가장 큰,

첫 실패는 무엇이었는가?


최근에는 대학교부터 시험을 치고 들어가는 분위기이긴 하나,

라떼만 하더라도

중학교부터 시험을 치고 들어가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시험이니 떨어지는 사람도 당연히 나왔다.


아인슈타인이 중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졌느냐고?

아니, 대학 시험에 떨어졌다.

그런데 그냥 대학에 떨어진 정도가 아니고,

가업의 실패로 이탈리아로 이민을 떠난 가족을 등지고 혼자서 독일에 남아 김나지움(고등학교)에

있으면서 너무도 당당하게 당시 유럽에 널리 알려진 명문 스위스 연방 공과대학에 들어가겠다고 큰소리치고 나서 한 방에, 가차 없이 떨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운이 좋았는지, 그의 범상치않았던 수학성적과 실력을 눈여겨봤던 학장이 1년을 스위스 고등학교에서 부족한 과목 점수를 채워오면 무시험으로 입학시켜주겠다고 하여 졸지에 스위스에서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니게 된다.

그 1년이 그가 나중에 인생을 회고할 때 가장 행복했던 1년이라고 하니, 아이러니컬하다.

대학에 떨어지고, 다시 고등학교를 다니는 과정에 가장 행복했다니...


흔히 알려진 것처럼 대학에 가서 그는 낙제점을 받고 졸업을 간신히 하게 된다.

천재라서?

아니다.

그저 제대로 수업에 들어가지 않아서였다.

그는 한 가지에 꽂히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과였고,

당시에 그가 꽂힌 것은 유럽 최고 명문대학에서 제공하는 연구실이었다.

결과는 낙제였지만, 당시의 다양한 실험 경험은 그가 훗날 천재로 불리는데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 성적이 좋지 못했던 아인슈타인은 학계에서 제대로 된 자리를 구하지도 못하고 친구 그로스만의 아버지가 도와준 덕분에 겨우겨우(?) 베른 특허청 3급 기술심사관으로 근무하게 된다.

낮에는 근무를 하고 평일 밤이나 주말을 이용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연구를 하는 생활이었다.

그런 주경야독의 방식으로 연구하고서도 그는, 1905년에 기념비적인 세 편의 논문(특수상대성이론, 광전효과, 브라운운동)을 써낸다. 그래서 1905년을 아인슈타인의 '기적의 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떤 무식한 이가 그랬다.

당시 누군가 아인슈타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온종일 학술 연구에 몰두할 기회를 주었더라면 훨씬 많은 업적을 냈을 것이라고...

내가 '무식한'이라는, 과감하고도 험한 표현을 쓴 것에서 유추했겠지만 그것이 착각도 어마어마하게 큰 착각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실패였을 그저 그런 특허청 직원의 근무는 무료하고 자괴감을 주기 십상이었지 싶다.


러나 그는 그 일상을 극복해낸다.

신기하게도 당시 그의 특허청 허가 업무에 제출된 연구들은 그의 연구를 뒷받침하거나 연계된 다양한 연구였음을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금 깊이 들어가서 설명해보자면,

아인슈타인은 특허를 얻으려고 제출된 기술이 기존 특허보다 더 참신한지 혹은 더 유용한 지 등을 판정하는 특허심사관 일을 했다.

당시 아인슈타인이 심사하던 특허 중에는 서로 다른 장소에 있는 시계를 어떻게 동기화(synchronization)하는지에 대한 특허 신청이 많았다.


시계를 동기화한다는 것은, 작전 전에 군인들이 하듯 서로 다른 시계를 같은 시각에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동일한 장소에서 시간은 시계를 서로 견주어 쉽게 맞출 수 있지만 서로 다른 장소, 예컨대 취리히의 시계와 베른의 시계를 동기화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지금은 대체로 세계 각지의 시간을 한 시간 단위로 나누지만, 하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중요한 도시마다 시간이 제각각이었다.


이론상, 지구가 한 시간 단위로 15도씩 찰칵찰칵 도는 게 아니라 연속적으로 회전하고 있으니까 원칙적으로는 경도상 차이가 나는 모든 위치에서 각기 조금씩 다른 시간을 규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한 배경적 이유로, 당시 특허에는 유럽의 머리가 좋은 이로 유명한 사람들의 특허 신청이 그 분야 몰렸고, 그 분야를 심사하던 아인슈타인은 자연스럽게 그쪽의 최신 연구와 임상결과를 미리 확인할 수 있는 위치에서 돈을 받으며 일을 했던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아인슈타인의 특허청 경력이 그가 특수상대성이론을 완성하는 데 절대적인 도움을 줬다는 반증이다.

물리학의 전문가였던 그가 다양한 난제에 부딪힐 때마다 오히려 그 해결책의 일부를, 자신이 생계를 위해 근무하던 곳에서 얻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연구는 다양한 관련 분야의 생각들을 모아 그것들을 통해 결합하고 융합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완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을 쓰겠다고 작업실에 틀어박혀 자판을 두들기는 이보다, 치열한 현실과 매일같이 마주하고 사회 현실이 빼곡한 자료를 정리하고 그것을 실체화하는 글쓰기를 이가 더 살아 숨 쉬는, 명작을 탄생시킬 기회가 많다는 것과 다름 아닌 진리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다른 나라 고등학교에 가서 1년을 더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은 차치하고, 그 학교를 다녔던 1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던 그였다.


결혼을 하고 돈을 벌지 못해서 가장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던 그는 다시 한번 삶에 좌절하고 자신이 태어난 것까지도 후회할 정도로 눈물을 찔끔 삼켰었다.


대학 성적이 안 좋아서 학교에 자리를 잡지도 못하고 3급 기술관으로, 그것도 친구 아버지의 소개로 들어가서 자괴감을 느낄만했지만 그 작업에서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자극과 정보를 통해 자신의 연구를 발전시켰다.


그는 자신의 연구에 자신의 일에서 접하는 정보들이 주는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정보를 활용하기 위해, 다양한 접근 방식을 검토하고, 자신에게 유용한 부분이 있다면 이를 새롭게 적용할 줄 아는 센스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융합적 통찰력'이라고 한다.


그가 천재라고 불리고 인정받은 이후 오히려 그는 과학의 최전선에서 소외된 채 프린스턴에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지만, 과학적으로 기여하는 바는 크게 없었고, 조용히 늙어갔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있었던 고난과 실패는 그를 눈물 나게 했고 슬프게 했지만, 그는 결국 그것들을 승화시켰고, 그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객관적인 사회적 기준의 잣대가 그가 훗날 천재로 인정받는 자양분이 된 것이다.

세상에 쓸모없는 시간이란 없고,

의미 없는 실패는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몸소 보여주었다.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의 시간이

지금은 힘겹고 아리겠지만,

그것을 당신이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그 시간들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당신의 고난스러운 지금을

내가 응원한다.


힘내라,

사랑하는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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