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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16. 2021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남을 제대로 알아주고 있는가?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자기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여라."


<논어>의 첫 번째 편 '학이'의 마지막 장이다.

유명하다면 유명한 구절이기도 하지만 그 속뜻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이는 드문 듯하다.


이 장에 해석을 단 윤 씨의 설명에 따르면 내용은 이렇다.

군자는, 자신이 다른 이에 대해 알지 못하면, 그의 옳고 그름과 간사하고 정직함을 알아볼 수가 없으므로 그것을 걱정으로 삼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에 대해 제대로 분석하고 알고 있지 못하면 그가 옳은 사람인지 제대로 된 사람인지 혹은 정말 천하의 몹쓸 놈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 없으므로 그것을 하지 못할까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내가 늘 억울한 사람이고,

내가 옳고 저들이 나를 핍박한다고 목소리 높이는 이들이

오늘도 여지없이 TV 뉴스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들은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피 토하듯 구호를 외치거나 

광화문에 나가 나이 들어 시비를 분간하기 어려운 이들을 호도하거나 

단식을 한다면서 화장실에 가서 초코파이를 먹는다.

저마다 사정이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정말 억울한 사정이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자신도 알고 있는 진실을 감추고 연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을 누가 다 알겠는가?

재판에 억울함을 호소하던 늙은 촌부가,

판사가 자신의 억울함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듯이

"그렇게 말하는 증거가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더니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렇게 말했단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아는데 당신만 모르는구나!"

웃픈 이야기다.

이 문구 때문은 아니지만 나역시 때때로 상대를 몰아치다가 멈칫하고 생각을 가다듬을 때가 있다.

혹여 내가 나만의 오해로 그를 몰아세워 감정적으로만 흘렀던 것은 아닌가?돌아본다.

그가 혹시 차마 말하지 못할 다른 사정이 있어 일이 꼬인 것은 아닌가?

내가 보지 못했거나 놓쳤던 것 때문에 진실이 아닌 것을 몰고 가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내가 그러한 과정을 통해 깨닫고 항상 조심하려는 것은,

사안의 진실이 명확하게 밝혀지더라도

상대의 입을 통해 그 부조리함이 명확하게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절대 상대를 싸잡아 비난하거나 막무가내로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내가 객관적인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다를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명확하다고 생각하고 확정하는 순간

나는 주워담지 못할 결정적인 실수를 할

확률이 커지는 것이다.


그것은 슬픔이나 분노 등의 감정에 휩싸여 있을 때

그럴 확률이 더 크다.


경계해야 한다.

자신이 군자가 되기 위한 거대한 목표가 없더라도

사소한 것 때문에 가까운 사람과 감정을 상해서는 안되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이

결국 내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 장의 내용을 또 다른 대의로 분석하는 방식도 있다.

21세기의 내 해석까지 조금 더 보태자면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내게 이 일을 맡겨주면 확실하게 성공시킬 능력이 있고, 내가 이 일의 적임자인데,

문득 상사가 이 일을 나보다 못해 보이는 녀석에게 맡긴다.


상사의 아이를 위한 선물을 들고 상사의 사무실로 들어가던 녀석의 얼굴이 떠오른다.

결국 능력이 아니라 친분에 의해 일이 이루어진단 말인가?

이런 그림에서 흥분하고 눈물 한 방울 툭 떨구며

이따위 회사 때려치울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런 결정을 내린 상사에 대해 당신은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그에 대해 제대로 분석하여

그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그가 나에 대한 어떤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지

차분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와 한 번이라도 왜 그런 결정이 났는지에 대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는가?


무턱대고 다른 이가 나의 참된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분노하기 전에

나는 그를, 혹은 그들을 제대로 분석하고 파악하였는가에 대해

냉정하게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에게 묻고 들을 필요가 있다.


항의하라는 말이 아니다.

당신이 제대로 알 수 없다면,

당신이 확신할 수 없는 그 무언가의 실체적 진실을

알기 위해, 당신은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람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그것을 접한 당신의 감정이

불쌍하다는 연민이 생각이 들고

언론이나 가짜 뉴스를 통해 호도하는 것에 혹 이끌려 분노하고 그것을 기정 사실화하는 누를 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생각해보라.

'모든 현상에 대해 의심하라.'는 철학적인 숙제까지는 내밀지 않더라도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하여 당신이 판단하는 정확도를 높여,

결코 쓰레기 언론이나 그것을 활용하려는 간악한 자들에게 놀아나는 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우리 사회에도 양반과 상놈

혹은 사농공상의 눈에 보이는 시스템이 있던

시대가 있었더랬다.


그것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는가?

내 눈에는

그것보다 훨씬 더 공고하고

불가역적이며

부수기 어려운

그 무언가가

우리 사회엔 있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의 눈에도 그것이 보이는가?

당신이 어디에 속할지는

당신이 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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