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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다떠는 옌 May 15. 2024

웃음의 늪 '웃태기'

What it should be is your smile.


안면마비 환자는 적어도 3개월 간 ‘웃음의 늪’에 빠지게 된다.  그 3개월 중, 병이 악화되는 초반 2주 정도는 웃음이 커질수록 부자연스러워지는 본인의 표정을 감추기 위해 무표정을 유지하는 노력을 일삼곤 한다. 

특히나 새로운 사람과 함께 있는 자리나 과거의 내 웃음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흉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에 내가 가장 지켜야 할 한 가지는 바로, 즐거운 감정에도 표정이 요동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나는 이러한 현상을 ‘웃태기(웃음과의 권태기)’라 불렀다.


“웃음은 사람의 마음을 표정 변화나 소리로 나타내는 표현방식이다. 동물 중에서 안면근육이 특별히 발달한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웃음의 뜻은 이와 같다. 

즉, 안면근육이 특별히 마비된 사람에게 볼 수 없는 특징이기도 한 것. 안면근육이 마비된 사람의 마음을 표정 변화로 표현하기 어려운 방식 중 하나이기도 한 것.

이 시기에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무엇일까? 

독특하게도 나는 이 ‘웃태기’라는 특별한 이 시기에 가족과 친구들에게 여러 차례 같은 요구를 받았다. 어쩌면, 다시는 쉽게 받지 못할 소중하고 감사한 ‘요구(What it should be)’를.




병을 진단받고 나의 일상의 패턴이 엉켰다는 생각이 들던 때, 일상으로 돌아갔다는 느낌을 주던 가장 큰 활동은 ‘친구 만나기’였다. 여느 때와 같이 학교 강의를 들은 후, 친구와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다가 친구와 중간 간식 타임을 가지고 수다를 떨며, 해가 질 때쯤 그토록 하고 싶었던 운동장을 산책하며, 야식(야식에 맥주 한 잔을 곁들이는 재미가 빠지게 되었지만)을 계획하는 것.


대학 시절을 겪어 본 이라면 모두 알겠지만, 점심 먹는 친구, 저녁 먹는 친구, 수업을 같이 듣는 친구, 산책하는 친구가 모두 따로 존재한다. 어디 친구뿐인가 내가 속한 공동체만 해도 근로, 아르바이트, 동아리 등을 합치면 하루에 만나 대화하는 이가 적어도 하루에 한 명 이상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깝지 않은 사람은 보고 묻지도 않겠지만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현재 내 상황에 대해 설명할 수밖에 없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대화를 한다면 서로의 시선이 머물게 되는 곳은 당연히 얼굴이기 때문. 

대부분의 사람은 시선이 머무르는 곳에 대한 주제가 입 밖으로 나오듯, 내 안면마비는 자연스러운 대화 주제로 통해졌다.


하루는 점심과 저녁 약속이 있던 날이었다. 하나는 같은 과 동기와의 점심 약속. 하나는 미루고 미루던 고등학교 동창과의 저녁 약속. 그 외에도 예견치 않았던 이를 만나기도 했던 날이다. 

원래의 하루가 그러듯이.


아침 수업이 끝나고 과동기와 학교 후문가에 위치한 가성비 백반집에 갔다. 제육볶음과 돈가스(최고의 조합)를 주문하고 물을 마시는데, 왼쪽을 휴지로 감추는 나를 보고는 친구가 걱정 반 장난 반이 실린 말장난을 쳤다. 원래부터 장난기가 있는 친구였다. 

음식이 나오고 먹는 도중 친구가 실실 웃으며 본인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해서 보여줬는데, 아주 귀엽게 한 쪽 입꼬리로 웃음을 짓고 있는 ‘알파카(밥 먹을 때나 웃을 때 한 쪽 입만 움직이기로 유명한 초식동물이다)’ 사진이었다. 

안 그래도 먹는 모습이 창피해서 숨기고 싶었던 ‘웃태기’ 시기에 내 웃음벨을 울려 버린 것이다. 나는 그대로 책상에 머리를 박고 웃어 댔다. 나는 웃음을 터놓고 나니 계속 웃으며 내 일시적인 묘기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힘들게 웃느라 내 밥 공기 속 밥은 반도 사라지지 못했지만, 친구는 먹는 속도가 더딘 나를 천천히 기다려줬다. 그렇게 우리는 예전과 다름없이 자연스럽게 웃으며 점심 식사를 마쳤다.


오후 일과까지 끝내고 나는 곧장 저녁 약속 장소로 향했다. 고등학교 동창(같은 대학까지 왔다)과 학교 후문 사거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친구도 장난기가 꽤나 있었는데, 만나자마자 내 던진 말이 “웃어봐”였다.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 요구를 듣자마자 정말 무방비 상태로 웃음이 터져버렸다. 음식점을 향해 걸어가는 길 내내 나는 어이가 없어 계속 웃고 있었지만, 그 친구는 덤덤했다. 그리고 우리는 닭 칼국수 집으로 가서 닭 한 마리 칼국수와 소주 한 잔과(나는 마시지 못했지만, 친구의 빈 잔에 채워주는 역할을 했다) 인생의 고민거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의 친구와 대학가에서 이런 주제로 대화하고 밥 먹는 날이 이리 금세 올 줄은 몰랐지만.


하루가 길면서도 짧다고 느끼던 밤, 근처에 자취하고 있는 친한 동아리 언니와 산책을 하기로 했다. 운동장에서 만나자, 언니도 나에게 같은 요구를 했다. 

“웃어봐(음성지원까지 되는 중이다).”

그러곤 따뜻한 음료를 내게 건네며, 산책하는 동안 얼굴에 대고 있으라 했다. 

차가운 봄바람이 불던 3월의 밤. 내 볼은 따스웠다.



이후에도 가족들과 영상 통화를 할 때나 한의원에 방문할 때, 그리고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모두 나에게 웃어보라는 요구를 했었다. 발병 후 1년이 지나고, 우리 가족은 내가 외국에 있을 동안에도 영상통화만 걸면 꼭 웃어보라 요구한다. 

덕분에 지금의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양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다(왼쪽은 살짝 근육에 눌리는 느낌이지만).


웃음의 늪에 빠지던 ‘웃태기’ 시절, 나는 얻은 것들이 많다. 

독특한 별명들(지킬 앤 하이드, 알파카, 부리부리 대마왕 등)과 구안와사, 벨마비, 안면마비 등의 명칭이 익숙지 않은 이들에게는 저스틴 비버와 양희은 씨가 앓았던 병이라는 정보도 얻었고, 그럴 때면 그분들이 어떻게 그 병을 이겨내고 어떤 후유증에 고통받고 있는지 직접 검색해서 찾아 봐주는 관심도 받게 되었다. 

병까지 얻을 만큼 열심히 살았다는 인정도 받을 수 있던 기회였다. 


무엇보다 가장 감사하게 여기고 있는 건. 그들이 해줬던 ‘요구(What it should be)’이다. 

내게 힘이 되었던 수많은 걱정과 응원의 말들도 있었지만, 

웃어보라는 요구를 받았기에 나는 이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그들의 요구는 “What it should be is your smile.”이었을 테니까. 


*What it should be is your smile. : 당신의 미소가 중요하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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