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다떠는 옌 May 19. 2024

한(韓)의학 VS 양(洋)의학

숲과 나무


일평생 의학과 관련된 제목으로 글을 작성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나는 관련 전공자도 아닐뿐더러 의학에 관한 서적을 접해 본 적도 없기 때문. 그런 이유로 아쉽게도 이번 페이지에는 한(韓)의학과 양(洋)의학을 전문적으로 비교하고 논하는 내용은 담기지 않을 예정이다. 단지, 일개 안면마비 환자로서 두 분야의 전문가에게 진료를 받으며 겪은 혼란을 토대로 얻을 수 있던 지혜를 전하고자 한다.


투병의 길을 걷게 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씨앗이 되길 바라며.




과거에 한방 병원에서 영상의학과 과장으로 재직하셨던 아버지께서 서양의학과 한의학에 대해 얼핏 해주신 말씀이 있다. 서양의학은 임상실험을 통한 수치를 바탕으로 질병의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기술과 약물로 질병을 치료하는 과학적 의학이고. 한의학은 각 환자의 체질과 특성, 정보에 집중해 그 사람에게 적절한 처방을 하는 경험적 의학이라고. 즉, 나무와 숲에 비하자면 서양의학은 숲에 있는 나무가 시들었을 때 나무의 시든 잎과 줄기, 세포들에 대해 관측하는 역할을. 한의학은 숲 전체를 들여다보고 나무가 시들게 된 주변 환경에 집중해 총괄적으로 보살피는 역할을 가졌다는 것.


두 의학은 서로 다른 장점과 특징을 가지고 있어 두 가지 치료법을 병행했을 때 시너지 효과를 보는 경우가 있다는데, 그게 바로 안면마비 환자인 나의 경우였던 것이다. 숲에서 보낸 신호를 확인하고 시든 부분을 고치면서 숲의 전반적인 환경 상태도 함께 체크해야 했던 상황. 또 다른 나무가 시들지 않도록 시들어 버린 나무를 보살피면서 다시 숲 전체를 가꿔야 할 때였던 것.


그래서 나는 주 5회씩 한의원을 다니고, 2주에 한 번씩 신경과를 방문해 스테로이드를 처방받는 방식의 투병 계획을 세우곤 했다. 한의원은 내가 알아본 학교 근처로 갔지만, 신경과는 아버지께서 알아봐 주신 서울 쪽으로 다녀보기로 해 첫 방문을 함께 하기로 했다. 그렇게 아버지와 처음으로 신경과를 방문했던 주말, 어떤 혼란에 시달리게 될 줄도 모른 채.


신경과에서도 전에 진료받은 것과 비슷한 이야기들을 해주셨다. 그리고 턱관절 밑쪽에 놓는 스테로이드 주사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셨지만, 사람의 몸에 따라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어 크게 권하진 않으셨다. 안면마비는 사람마다 회복 속도나 후유증이 달리 남을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회복하고 후유증이 생기지 않도록 한의원에서 물리치료를 꾸준히 받고, 신경과에서 스테로이드와 항바이러스제를 처방받아 꾸준히 먹으라는 이야기를 끝으로 1~2주에 한 번씩 경과 확인을 위해 방문하라고 하셨다. 이 진료 끝에 순수했던 나의 질문.


"혹시 한약을 먹으면 더 빠른 효과가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신경과에서는 한약을 복용하지 말라고 하셨다. 한약에 어떤 성분이 들어가는지 확인할 수 없고, 안면마비에 걸린 환자는 스테로이드와 항바이러스제 약물을 복용하는 게 맞다고. 그러나, 불과 이틀 전 한의원에서는 신경과에서 권하는 고용량 스테로이드 주사를 절대 맞지 말고, 약도 먹지 말라고 했었다. 나는 이를 무시한 채, 대상포진에 의한 염증 때문에 결국 신경과를 방문하긴 했지만. 양방에서는 한약을 절대 먹지 말라하고, 한방에서는 고용량 스테로이드를 먹지 말란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환자는 어떤 치료법을 선택해야 할까?


주말 내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끝에 결국 나는 두 가지 치료법을 모두 시도해 보기로 결정했다. 단, 시기를 적절히 나눠서. 안면마비의 골든타임(72시간)을 놓친 환자의 경우 '급성기(발병직후 3개월)' 간의 치료가 후유증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중요 시기인데, 이 중에서도 안면마비 상태가 극에 달하는 초반 2~3주는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즉, 발병 1개월 후) 한두 달간은 한약을 복용하기로 했다. 대상포진으로 인한 바이러스가 안면마비의 원인인 것도 팩트, 현재 몸 전체의 면역력이 저하된 상태라는 것도 팩트이기 때문.




사실, 나는 이 결정을 내리면서 억울하고 창피했다. 내 나약함과 무지함에. 하루아침에 얼굴이 마비되고 이질적인 내 웃음에 당황한 나머지, 이곳저곳 다니며 빨리 고치고 싶었던 모양이다. 제발, 내 웃음을 돌려달라고 의사 선생님들께 부탁하고 의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과정 자체가 스트레스가 된다는 사실도 묵인한 채. 차라리 그 시간에 저 멀리 작은 숲으로 도망쳐 쉼을 찾았더라면 더 괜찮았겠다고 생각했던 순간이었다(혹시나 그럴 강단이 있으신 분은 추천드려요).


그렇게 깨우치게 된 사실 중 하나는 내게 가장 필요한 처방은 바로 나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 의사 선생님들은 의학 범위 내에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치료를 도와주시는 것뿐. 내 몸의 아픈 곳은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 고쳐 나가는 거였구나.


안면마비는 자연히 시간이 지나면 나을 병이란다. 그 시간이 사람마다 달리 걸릴 뿐. 그리고 그 상처가 깨끗하게 아물 수도, 흉으로 질 수도 있을 확률이 있을 뿐. 누구나 후유증 없이 아물게 만들고 싶을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발병기 동안에 자신에게 '쉼'과 '힘'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고안하고, 앞으로 내 몸을 어떻게 가꿔 나가야 할지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 또한 환자의 몫이었던 것. 이것이 약 2주 간 여러 병원을 다니고 수 차례의 진료를 받으면서까지도 스트레스를 받아왔던 내가 나에게 내린 처방이다.


그제야 깨달았다. 숲에서 내게 보낸 신호의 의미를. 어딘가 시들어 버린 내게 필요한 건 마법같은 치료제가 아닌, 나의 '공(功)'이라고. 이제 숲을 다시 보살필 때라고. 시들었던 그곳에 다시금 예쁜 새 생명이 필 수 있도록.


이전 08화 웃음의 늪 '웃태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