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성격이 바뀌는 때, 나는 껍데기를 벗기로 했다.
「“내가 갑자기 왜 이러지” 싶을 때가 있다. 갑작스레 찾아온 무력감, 이유 없는 우울을 마주하고, 이겨내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며 당혹스러운 때가 있다. 어쩌면 그 감정은 갑작스레 찾아온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전까지 힘들지 않았던 게 아니라, 현실에 치여 나를 돌아볼 틈이 없던 것이다. 마음이 힘든 줄도 모르고, 몸이 상하는 줄도 모르고 살아온 것이다. 여태 버텨온 나를 대견히 여기자. 나를 책망하는 것이 아닌, 고생 한 내게 충분한 쉼을 선물하자. 내가 부서지지 않도록,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나를 보살피자.」
- <가장 아끼는 너에게 주고 싶은 말> 中 -
‘환절기(換節期)’, 계절의 성격이 바뀌는 때를 뜻한다. 하루이틀 사이 갑작스럽게 기온의 폭이 크게 변하기도 하고, 일교차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지기도 하는 시기이다.
또한, 큰 일교차에 의해 몸이 쉽게 피로해지고 무기력해져 각별히 신경 써야 할 시기이다.
사람에게도 그런 ‘환(換)’절기가 존재한다. 하루이틀 사이 감정의 폭이 크게 변하기도 하고 기운이 빠지기도 하는 시기. 갑작스레 몰려오는 피로함과 무력감을 이겨내야 할 시기.
나는 이런 ‘환(換)’절기를 보내고 있을 때, 책망을 멈추고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선물하기로 했다.
나는 이번 환절기가 다른 때보다 더 오래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매일 같이 물리치료를 받아도 큰 진전이 없는 근육의 움직임에 하루가 멀다 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락날락했기 때문.
한의원에서 말하던 대로 오후 6시쯤이면 급격한 피로함에 무기력해지고, 침치료를 받고 나면 기운이 빠져 나머지 일과를 치르기 어려운 날도 있었다.
하루는 의사 선생님께서 그러셨다.
“회복 속도가 너무 더디다. 치료하는 의사도 불안하네..”
이럴 때면 쓸데없는 생각들을 떨쳐 내기란 쉽지 않았다.
‘이러다 만성 안면마비가 되면 어쩌지, 계속 이 웃음을 짓게 되면 어쩌지. 아니야, 진전 속도가 더딜 뿐이야, 이럴수록 더 좋게 생각해야지.. 그런데, 내가 갑자기 왜 이런 병을 얻게 됐을까..’
한창 나를 책망하던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부모님께서는 이번 학기(4학년 1학기)부터 휴학하는 것을 권하셨지만, 그 고민을 시작할 때는 이미 중도 휴학신청 기간마저 지나버린 상태였다. 무엇보다 계획 없이 휴학을 결정하기엔 두려움이 컸기 때문에 가능했어도 쉽게 결정하지 못했을 거다.
그러나, ‘휴학’이라는 키워드는 내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만약 다음 학기라도 휴학을 하게 된다면 나는 무얼 할 수 있을지 그 시간이 정말 휴식기가 될지 뜻밖의 고민을 하게 되었다. 특히나 4학년 막학기를 앞두고 하는 휴학은 더욱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휴학’이란, 여러 걱정을 앞서게 하기도 그만한 가능성을 꿈꾸게 하기도 하는 키워드였기 때문.
사실 나는 이미 2학년 때 1년간 휴학을 했던 대학생이다. COVID-19가 유행했을 때, 온라인 수업이 아쉬워 휴학을 하고 인턴 생활을 했었다(아무래도 이때 체력을 끌어 쓴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이 두 번째 휴학이 올바른 선택일지 그 휴학기 동안 내가 또 다른 무엇을 경험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계획되지 않은 고민을 하게 만든 이 사태를 다시 원망하기도 했다. 아주 이랬다 저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과정마저 나는 참 환절기에 충실했던 것 같다.
왜 다른 학생들처럼 평범하게 4학년을 끝맺지 못하는지. 취업을 준비하기도 만만치 않은 시간이건만, 앞으로 먹고살 궁리를 하기에도 모자란 이 시간에 더 어려운 과제가 주어진 것만 같았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건만, 이미 벌어진 걸 어쩌겠는가.
이 순간을 기회로 여길 수밖에.
평범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건 나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려는 신의 계획이라 믿는다. 환절기를 고통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어차피 변할 나의 계절에게 작은 선물을 주는 것은 어떨지 고민해 보았다. 지금의 나는 어떤 형태의 ‘쉼’과 ‘공(功)’이 필요한지 말이다.
그렇게 내가 내린 결론은 “평범할 수 없다면 더 멀리 튀어 보자”. 본래 모습과 환경에서 한 번 벗어나 보기로.
다음 계절의 나를 위해서.
더 이상은 나를 책망하기 싫었다.
그리고 이대로 정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모르는 세상, 나를 모르는 세상으로 훌쩍 가보고 싶었다.
고생 한 내게 충분한 쉼을 선물하기 위해서. 더이상 부서지지 않도록.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나를 보살피기 위해서.
이런 나의 뜻을 조심스럽게 가족에게 전해보았다.
“저 1년만 캐나다 다녀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