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플수록 웃는 자가 일류다.
아버지께서는 갑작스러운 내 제안에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하셨다.
하나뿐인 외동딸이 첫 해외를 캐나다로, 그것도 단순 여행이 아니라 1년 간 살다 오겠다는 말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지 안다. 그 마음을 알기에 호주, 아일랜드, 영국 등의 선택지는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먼 친척이 자리 잡고 있는 ‘캐나다’를 당당히 외쳤던 것. 객지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족에겐 큰 안심이 될 테니까.
그렇기 때문인지, 아버지의 시간은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흔쾌히(?) 다녀오라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투병생활 중에 캐나다 워킹 비자를 준비했다.
인생 첫 해외. 명칭만큼이나 그 준비과정은 크게 설레지도 특별하지도 않았다. 정말 무덤덤하게 캐나다 워킹 비자받는 법을 검색하고 나오는 절차에 따라 차근히 준비하려 들었다.
가장 먼저, 캐나다 현지 정부에서 운영하는 IRCC(CIC)라는 웹사이트에서 계정을 만들고 인비테이션을 신청하려던 차.
웬걸. 여권 번호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권이 없는데?’
순간 실감이 났다. ‘처음’으로 나가는 해외라는 걸.
나는 7월 출국을 목표로 3월 말에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비자를 받아야 하는 상태였다.
게다가, 여권 사진조차 없어 안면마비가 걸린 상태로 당장 사진을 찍어야 하는 상황. 얼굴이 더 자연스러워지는 날까지 기다릴 순 없었다. 당장 오늘 사진을 찍더라도 여권은 일주일 후에야 발급되니까.
어쩔 수 없지.
수업 끝나고 바로 가까운 사진관으로 가는 수밖에.
학교 후문에 자리한 아주 작은 동네 사진관에 방문했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 오신 주인장 할아버지 한 분밖에 계시지 않았다.
첫 방문이라 하니 이름과 이메일, 찍을 사진의 종류 등을 적을 수 있는 종이를 하나 건네주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내 종이를 보시곤 머리를 귀 뒤로 묶고 앞머리도 정리하고 카메라 앞에 놓인 자리에 앉으라 안내해 주셨다. 난 어차피 웃지 않아도 될 사진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촬영은 5번 내지의 찰칵 소리를 내곤 빠르게 끝이 났다.
나는 수줍게, 아니 조심스럽게 할아버지께 한 가지 요청을 드렸다.
“저 얼굴 대칭 보정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지금 이게 제 얼굴이 아니라서요.”
많은 보정을 바라는 게 아니라, 원래 내 얼굴이 나오길 바랐을 뿐이다.
다행히 사진은 하루 만에 받을 수 있었다. 사진을 받고 돌아가는 길에 나는 계속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얼굴의 정확히 반만 하나의 미동도 없을 것 같이 멈춰진 채로 표현된 게 신기하기도 하고, 하필이면 이 상황에 여권 사진을 찍은 것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오더라.
가족과 친구들에게 공유해 주니 유쾌한 답변들이 줄지어 왔다. 그중에서도 이 해프닝의 대목이 되어준 친구의 코멘트가 하나 기억에 남는다.
“야야, 완전 그거다. 그.. 아수라 백작!”
안면마비에 걸리고 나서 처음으로 찍은 사진이 ‘내 인생의 첫 여권 사진’이었다.
그것도 왼쪽 얼굴이 오른쪽에 비해 쳐져있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끔. 세상 어느 안면마비 환자가 얼굴이 마비된 채로 사진관에 가서 돈을 내고 사진을 찍겠는 가.
심지어 그게 나일 줄이야. 유쾌한 이 병 덕분에 평범한 일에도 가까운 친구와 가족이 함께 웃으며 그 시간을 남기고 있었다.
어떻게 또 이 시기를 간직하라고 이런 기회를 주시고 사진을 찍게 하셨을까. 캐나다 가서도 내가 욕심을 부리려 할 때면 다시금 이 시절을 떠올리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모든 일이 일어나고 흐르는 데에는 이유가 아주 없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 내가 지금 캐나다에서 다시 대상포진에 걸려(쉬러 왔는데 또 욕심부려 일하고 여행 다니다가 결국 이번에는 오른쪽 눈 주위에 대상포진이 났다) 휴식기를 갖고 있는 것처럼. 그 휴식일에 내 방에서 여권을 보고 웃으며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것처럼 -.
다시 돌이켜 보니 아플수록 웃을 일도 참-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