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영국 히드로 국제공항입니다.
두 달이 채 남지 않았다.
영국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이제 두 달이 채 남지 않았다. ‘집이랑 차는 어떻게 할까?’, ’ 회사는 언제까지 다닌다고 해야 하나?’, ‘아직 집 정리도 안 했는데, 영국에 짐은 언제 보내지?’, '애들은 뭘 준비해 가야 할까?', '보험은 다 해지해야 되는 거야?’ 등등... 내 머릿속은 여러 가지 해야 할 일들로 복잡해졌고, 몸과 마음은 급해졌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순서를 정해야 돼!!”
급하기만 한 내 마음에게 명령을 하듯이 혼잣말을 하고는 크게 숨쉬기를 해 본다. "휴우~"
비자를 받자마자 직장에 공식적으로 사직할 것을 알렸고, 1주일간 영국에 다녀와야 한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 이유는 영국에서 살 집을 찾기 위해서였다. 인터넷을 통해 알아보고, 남편 지인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 학교와 치안 등을 고려해 우리 가족이 거주할 지역은 정했지만, 집을 선택해서 계약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영국에서 지낼 곳이 정해져야 이삿짐도 보낼 수 있으니 가능한 한 빨리 결정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무리가 되더라도 남편과 직접 가보기로 결정하고 어렵게 휴가를 얻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1주일 만에 영국에서 집을 찾아 렌트 계약까지 하려고 했던 우리의 계획은 정말 영국적이지 않은 생각이었다.
영국은 한국과 달리 Estate agent (영국의 부동산)를 통해서 원하는 집을 한 번 보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고, 영국 런던의 렌트비는 생각보다 정말 비쌌으며, 집주인 중에는 어린아이들이 있는 가족이라고 렌트를 거절하기도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적당한 집을 찾게 되었으나, 집주인은 우리가 이전 렌트 기록이 없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보증금과 월세 6개월치를 선불로 지급할 것을 요구하였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여 집을 계약하였는데, 처음으로 외국인 대접(?!)을 받는 묘한 느낌과 앞으로 영국에서 헤쳐가야 할 많은 일들이 걱정되기도 하였다.
부랴부랴 영국에 다녀와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영국으로의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집에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영국에 보낼 이삿짐들은 따로 분류했다. 미리 선택해 둔 해외이사업체 몇 곳의 견적을 받아서 그중에서 가장 신뢰가 가는 업체와 계약도 하였다. 한국의 짐이 영국에 도착하기까지 보통 두 달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이 두 달 정도 지낼 때 필요한 물품과 중요한 것들은 따로 이민 가방에 정리하였는데, 정말 짐을 싸고 풀었다가 다시 싸기를 수십 번은 한 것 같다. 정말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고된 과정이었고, 덕분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살 빠졌다”는 평소에 그리 간절히 듣고 싶었던 말도 들었다.
아이들과 관련해서는 먼저 학교와 어린이집에 이민 갈 것을 알렸고, 교육청에도 신고하였는데, 혹시나 한국에 되돌아오게 되었을 때 아이들이 다시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했다. 다행히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큰아이는 겨울 방학을 거의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게 되어서 마치 새 학년이 되어 새로운 반을 찾아가는 다른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이별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건강과 관련하여 필요한 예방접종을 모두 마친 후에는 증명서도 챙겼고, 이전에 치료받은 기록과 관련 자료들은 복사본으로 마련해 두었다.
남편과 나는 직장에서는 맡은 업무를 잘 정리해서, 인수인계를 해야 했고, 퇴근 후에는 짐을 정리하였다. 쉬는 날에는 다른 중요한 일들을 처리해야 했는데, 남편은 집과 차, 은행 업무와 보험 관련 일들을 맡아하였고, 나는 짐을 분류하고, 영국에 이삿짐을 보내는 것과 아이들 관련된 일들을 주로 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해야 할 미션들은 클리어되었지만, 남편과 나의 눈밑 다크 서클은 점점 늘어 퀭한 한 쌍의 판다 부부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 보니 한 달이 흘렀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마음 한쪽에 몰아 두었던 ‘가족과의 이별’이라는 보따리를 이제 꺼내야 될 것 같았다. 나는 운이 좋게 결혼하고도 시댁과 친정 근처에 가까이 살아서 항상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북적거리면서 살았다. 그런 내가 가족과의 헤어짐을 준비하려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먼저 흘렀다. 그래서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딸을, 그런 언니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슬픈 마음을 감추고 있는 가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고, 안아주는 것도 내가 할 일이었다. 특히, 근래에는 눈물 마를 날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엄마와 눈을 마주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의지하던 큰 딸과 큰 사위, 당신의 손으로 직접 키운 손녀와 손자를 멀리 보내시는 그 맘이 얼마나 아프실까? 애들을 볼 때마다 말씀은 안 하시고 아이들 손만 매만지시는 모습에서
"내가 너희들을 보내고 어떻게 살까?"
하시며 가슴으로 우시는 것 같다.
출국일을 2주 남겨두고, 우리는 남은 기간을 친정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래서 미리 우리 집을 비우고 모든 짐을 싸서 엄마 집으로 향하는 미니 이사를 했다. 차에 가득 짐을 싣었고, 남편은 아이들과 주차장으로 먼저 내려갔다. 혼자 남은 나는 마지막으로 두고 가는 게 없는지 집을 한번 휑하니 둘러보고 문을 닫았다.
‘띠리리릭...’
전자키의 잠금장치가 잠겨지는데, 동시에 눈물이 뚝!... 떨어진다.
결혼하고 처음 장만한 우리 집이었다. 첫 집이라고 무지 애정을 가지고 꾸며 주었던 정든 이곳을 이제 떠나려니 왜 그리 서운한지.. 이렇게 나는 한국에서 정들었던 사람들과 소중한 것들과의 이별을 시작해야 했다. 내가 선택한 일이었지만, 내 마음은 그걸 모르는지 남 탓을 하듯이 서운하다고만 한다.
엄마, 아빠, 동생들과 보낸 3주간의 시간은 진짜 매일이 먹방이었고, 매일이 즐거운 놀이였다. 엄마는 아예 거실에 이부자리를 다 펴서 온 가족이 모여 자도록 해 주셨는데, 정말 먹고 자고 놀기만 했다. 행복한 피난민 같았던 그 모습들이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 하지만 그렇게 가족들과 원초적인 시간을 보냈던 것이 많은 이민 준비 중에서 제일 잘한 일 같다.
2010년 12월 31일, 오전 11시
감사하게도 시댁과 친정 식구들이 모두 인천 공항에 모였다. 대규모 가족들의 눈물 섞인 배웅을 뒤로하고 퉁퉁 부은 눈으로 우리는 영국행 비행기를 탔다. 아들은 유모차에서 잠든 채 출국해서 눈을 떠보니 비행기 안이었고, 딸은 처음 타 보는 비행기에 신나 있었다. 남편과 나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평소에는 대화를 많이 하는 우리였지만 그날은 별 얘기를 하지 않은 것 같다. 그저 ‘이민’이라는 우리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 아니기를, 우리 가족에게 하나님의 보살핌이 함께 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13시간 동안 하늘을 날았다.
여전히 2010년 12월 31일, 오후 4시
우리는 8,852km를 날아서 9시간의 시차를 뚫고, 영국 히드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다인종, 다민족, 다언어의 나라답게 공항에 있는 사람들은 얼굴도, 언어도 가지각색이고, 사계절의 옷을 모두 찾아볼 수 있게 각자의 스타일대로 입고는 분주하고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한쪽에는 정지해 버린 화면처럼 35세 아빠와 엄마, 8살 딸, 유모차 탄 3살 아들 그리고 몇 개의 캐리어와 커다란 이민가방 2개가 공항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오늘부터 1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