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이민가족(1)
이민 가면 뭐가 제일 힘든가요?
가끔씩 한국에 가서 만나는 가족이나 지인 들 중 이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자주 묻는 질문 중 하나가 “이민 가면 힘들지 않아?” 또는 “언제가 제일 힘들었어?”라는 질문이다. 그때마다 주저 없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은 단 하나, 갑자기 우리 가족 모두가 영국에서 불법 체류자가 되었던 일이다. 그 일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제일 먼저 분노라는 감정이 ‘나를 불렀느냐~’ 하며 반갑지 않게 찾아오길래 가급적 끄집어내지 않았다. 오늘은 오랜만에 그 기억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휴우~, 일단 크게 심호흡을 하고…
유니야, 쿨하게 쓰는 거야... 릴랙스~릴랙스~'
사건의 발단
영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교회 어르신이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며 소개를 해 주었다. 그 회사의 사장인 S도 우리와 같은 교회에 다니고 있어 자연스럽게 인사를 할 수 있었는데, 60대 정도의 아담한 체구를 가진 남성이었다. S는 오래전에 주재원으로 영국에 왔다가 사업가로 정착하였다고 하며, 한인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인정받는 사업가로 자리를 잡았고, 두 딸을 전문직 여성으로 잘 키운 소위 '성공한 이민자'였다.
주변 사람들이 “예전에 우리 교회 다니던 분이니 꼭 좀 도와주라”고 거들며 분위기를 몰아갔고, S도 "아, 그럼 제가 도와드려야죠.”하며 긍정적으로 응답하더니 정말 순식간에 남편이 취업되었다. 원래 남편과 나는 무엇을 결정할 때 참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느라 시간이 걸리는 편이었는데, 낯선 곳에 와서 아직 수면 마취가 덜 풀린 듯 멍~한 상태였던 우리는 주변 분위기에 쉽게 휩싸였다. 또한 한 달 정도 영국에 살아보니 예상보다 생활비가 많이 들어 걱정이 됐는데, 정기적인 수입이 들어오는 아르바이트를 얻게 된 것 같아 행운이라고도 생각했다. 어르신과 S에게 몇 번이나 감사의 인사를 했고, S가 일찍 시작하면 좋겠다고 해서 바로 다음 주부터 일하기로 결정했다.
“아르바이트처럼 일하는 거니까, 부담 없이 자기가 하려는 일과 같이 하면 되겠네~”
“이민 오자 마자 이런 좋은 일이 생기는 것 보니 앞으로 잘되려나 봐. 까르르르~~”
그렇게 시작은 핑크빛이었고, 나는 호들갑스럽게 좋아했다.
그렇게 남편의 아르바이트가 시작되었고, 남편은 주중 1일과 토요일에 출근하기로 했다. 급여는 많지 않아 생활비의 일부를 보조해 주는 정도였지만, 전적으로 한국에서 가져온 돈에 의존하며 살던 우리는 그게 어디냐며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또한 같은 교회를 다니다 보니 S의 가족과도 친해지게 되었는데, 그의 와이프는 교회에서 나를 만날 때마다 이민 초기에는 다 힘들다며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라고 챙겨줘서 너무 고마웠다.
그렇게 한 달쯤 되었을 때, 남편이 퇴근하고 와서는 한 장의 종이를 꺼낸다.
“이게 뭐야?”
“근로 계약 서래. 2년 +1년 계약이래. 2년 뒤에 다시 의논해서 1년 더 한다네.. 이런 계약도 있나?"
“그르게.. 근데 왜 근로 시간은 없어? 그냥 아무 때나 일하라고 하는 계약서 아냐? 하하하.”
“하하하... 설마.. 아무튼 2년이나 계약해 주시고 고맙네.. 그렇지?”
“S는 좋은 분 같아. 사모님도 상냥하시고, 정말 고마운 분들이야...”
‘눈에 콩깍지가 씌다’라는 말이 꼭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만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우리 눈에는 울트라 콩깍지가 씌었던 것 같다. 새롭게 만난 세상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만 보는 이민 초짜다웠다. 또한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그날의 대화가 현실이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언젠가부터 남편이 출근하는 날이 늘었다. 주 1일이 2일이 되고 3일이 되었다. 같이 일하던 B가 갑자기 그만둬서 새로운 직원을 구할 때까지 업무를 대신해야 한다고 했다. B는 이민 생활 8년 차의 베테랑 이민자로 우리가 모르는 것을 다 알고 있어 우리에게는 Google과 같은 존재였다. 남편과 B가 업무를 같이 하다 보니 친해졌고, 자녀들도 연령대가 비슷해 온 가족이 쉽게 가까워졌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그만둬서 서운했다.
남편이 주중에 출근하는 일이 많아지니, 내가 혼자서 해야 할 일들도 많아졌다. 근무하는 날이 늘었지만 급여는 동일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불만은 쌓이고, 남편과 말다툼하는 날이 늘어났다. 그러나 정작 주일에 교회에서 S를 만나면 그가 먼저 매번 미안하다며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서 그러니 조금만 이해해 달라고 하고, 그의 와이프도 정말 오버라고 생각할 정도로 ‘힘들게 해서 어떻게 해..’라며 엄청나게 미안함을 표현하니 어쩔 수 없이 나는 “괜찮아요"라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야 했다. 뭐가 괜찮아.. 정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렇게 풀타임으로 일을 하고 파트타임 급여를 받는 이상한 아르바이트가 계속되었다. 더욱이 런던 외곽의 우리 집에서 시내 회사까지 출퇴근을 하려니 교통비 지출이 늘었고, 가장 심각했던 것은 원래 남편이 계획했던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통장의 잔액은 줄어가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모호한 생활이 계속되자 점점 스트레스 레벨이 올라갔다.
<< 여기서 잠깐 >>
지금까지 이 글을 읽으신 분들 중 어떤 분들은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저렇게 살았을까?" 하고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분들의 이해를 돕자면... 한국에서 살던 사람들이 이민 와서 바로 현지 사회에 들어가 살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 초기 정착할 때는 한인사회에 들어가서 앞으로의 이민 생활을 위한 정보를 얻거나, 영국에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한인 네트워킹을 형성하려고 한다. 그런데 막상 한인 사회에 들어가면 보수적이고 유교적인 그들의 모습에 놀라게 된다. 그 이유는 한인 사회의 중심이 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된 이민자들인데, 그들은 한국을 떠나올 때의 경험과 관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한국의 변화된 문화 속에 살다가 온 최근 이민자의 눈에는 매우 이상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절대적인 경로사상으로 연장자에 대한 예의에 민감하고, 남녀 역할에 대해서도 매우 보수적이었다. 또한 남에게 보이는 겉모습을 매우 중요시하였으며, 돈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은 품위 없는 행동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연장자인 S에게 품위 없이 급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영국에 오기 전까지 정신건강센터의 부센터장으로 일을 했던 나는 공과 사가 분명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자기주장도 확실한 커리어 우먼이었다. 하지만 영국 한인 사회의 압도적인 분위기에서 나는 조신한 애들 엄마일 수밖에 없었다. 교회에서의 S는 우리 가족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고, 아이들에게도 다정하였다. 그런 그를 보고 있노라면 머리가 아팠다. 이런 내 속도 모르고 일부 교회 사람들은 우리가 S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 헐...
사건의 전개
영국에 온 지도 1년이 거의 다 되었다. 남편은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려고 바쁘게 지냈지만 일관적이지 않은 근무시간은 남편의 일에 방해가 되었다. 비자를 연장하려면 남은 1년 동안 일정 소득을 증명해야 했는데, 지금처럼 지내다가는 사업도 제대로 못하고 사업자금만 생활비로 다 써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남편은 사업에 집중하고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기로 결정하였다.
며칠 후에 남편은 S에게 우리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그만두겠다고 하니, S가 주말에 식사나 하자며 우리 가족을 집으로 초대하였다. 우리는 송별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쁘게 받아들였고, 예쁜 케이크를 사서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화기 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마치고 커피와 케이크를 앞에 두고 대화를 하던 중에 그가 갑자기 우리가 Tier 2 취업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회사에서 스폰서십을 제공할 테니 계속 같이 일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는 우리가 취업비자로 바꾸면 소득증명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고, 지금과 같이 일만 해 준다면 영주권을 받을 때까지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다만 현재 회사 형평상 월급을 넉넉하게 줄 수가 없지만, 회사 사정이 나아지면 생활비는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다. 마지막으로 영국에서 스폰서십을 받기가 어려운데, 성실한 남편을 믿고 특별히 해주는 것이라며 자신이 우리를 위해 크게 배려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비자 연장 문제로 한참 고민이 많았던 우리에게는 매우 솔깃한 제안이었다. 또한 교회에 비자 대행 서비스를 하는 사람이 있으니 만나보라면서 세심하게 우리를 도와주었다.
정말 뜻밖의 제안이었다. 우리도 안정적인 취업비자가 영국에서 영주권을 받을 때까지 지내기에 가장 좋은 비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회사에서 스폰서십을 지원받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해서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S가 먼저 제안을 해서 놀라울 따름이었다. 지금까지 참고 견딘 것에 대해 보상을 받은 것 같아 그동안의 서운함은 한꺼번에 사라졌다.
며칠 후, S가 소개해준 H와 비자 변경에 대해 의논을 하니 그도 좋은 기회라고 하였다. 취업비자로 변경하면 남편이 풀타임 직원이 되는 것이었고, 월급은 집 렌트비 정도여서 나머지 생활비는 우리가 해결해야 했다. 그것도 당분간은 한국에서 가져온 돈으로 해결하고, 아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는 내년부터는 내가 일을 하면 되니까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좋은 제안이었고, 시간을 끌다가 S의 마음이 변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우리는 비자를 변경하기로 빨리 결정하였고, 그 과정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은 우리가 전부 부담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2012년 5월, 우리의 비자가 변경되었다.
비자가 변경된다는 것은 명칭만 Tier 1에서 Tier 2로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자주독립적인 존재에서 누군가의 명령과 통제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절대적인 ‘을'로 정체성을 교체해야 했다.
정해져 있지 않은 남편의 근무 시간, 갑작스러운 업무 요청과 요구 사항들이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그나마 예의를 지키며 부탁을 하더니,
점점 예의도 없어지고,
S뿐만 아니라 그의 와이프의 심기까지 살펴야 하는
우리의 삶은 피폐해지고 있었다.
정말 너무너무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