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허니문은 아름답다.
새해 아침이 되었다.
우리가 영국에 도착한 다음 날, 2011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영국의 어느 곳에서나 New Year에 대한 설렘과 활기찬 에너지가 느껴졌고, 사람들은 오가면서 반갑게 “Happy New Year!”라고 인사를 한다.
이런 분위기에 동화되어 우리도 자연스럽게 영국 사람들과 인사를 하였고, 낯선 영국이었지만, 이런 경쾌한 분위기가 우리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아이들도 영국에 도착해서는 갑자기 바뀐 사람들과 주변 환경들이 불편한지 말하지 않아도 남편과 내 주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더니, 사람들이 웃으며 건네는 인사에 응대하기도 하고, 작은 목소리로라도 먼저 인사를 건네는 발전적인 모습을 보였다.
“HAPPY NEW YEAR!”
우리 아이들이 영국에서 배운 첫 영어인 것 같다.
영국도 새해 첫날은 공휴일이다. 그로 인해 Estate agent(영국 부동산)도 휴무여서 우리는 1월 3일에 계약한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3박 4일간 한인 민박집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손님은 우리 가족뿐이었다. 덕분에 넓은 공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고, 아침과 저녁에 나오는 한식은 너무 맛이 있었다. 게다가 민박집 사장님의 따뜻한 배려는 갑자기 가족들을 떠나 영국에 도착한 우리 가족에게 많은 위로가 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곳에서의 시간은 우리에게 워밍업이 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영국에 여행을 온 것처럼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은 말로만 듣던 영국의 풍경을 눈으로 보고, 다양한 소리를 귀로 들으면서, 맛있는 냄새가 나면 쪼르르 달려가 사달라고 하고는 그 맛에 행복해하면서 영국을 느끼고 있었다.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동네 공원에는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잔디밭이 있었고, 귀여운 다람쥐가 귀를 쫑긋하며 재빠르게 우리 앞을 지나갔다. 런던 시내의 예쁜 거리를 걸으며 분수대와 조각상들을 보는 것만 해도 좋았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소박한 상점들로부터 화려한 컬러와 디자인의 멋있는 건물들까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다 놓은 것과 같은 다양한 박물관들의 입장료가 모두 무료라는 것에 감탄하며 마음껏 즐겼고, London Eye에서 바라보는 런던의 야경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남편에게 기대어 오랜만에 로맨틱했던 연애 시절을 떠 올리기도 했다. 어쩌다 TESCO(우리나라의 이마트와 같은 상점)에라도 들리면 아이들을 유혹하는 과자, 초콜릿과 젤리가 너무 많아서 정말 골라 먹는 재미가 있었다. 당시에 우리 가족 모두는 영국의 모든 것에 설레었고, 보물 찾기를 하는 것처럼 커다란 눈으로 새로운 것을 찾아다녔다. 이민 허니문의 시작이었다.
영국 사람들은 친절했다. 길을 걷다가 마주치기만 해도 웃으며 인사를 하고, 버스를 내릴 때도 기사에게 ‘Thank you’ 하고 인사를 하고 내리는 모습은 신선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영국 지하철은 미로 같이 복잡하고, 많은 계단이 있어 유모차를 가지고 다니는 우리를 어렵게 만들곤 했다. 그러나 우리가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올 때마다 정말 예약이라도 된 것처럼 어디선가 도와주는 사람들이 짠~하고 나타나서 정말 놀라웠다. 우리의 땡큐 인사에 멋진 미소로 화답하고 무심히 자신의 길을 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누군가를 돕고, 배려하는 것이 익숙해 보여 감사하고, 감동했다.
주말에는 시내의 한인교회를 다녔는데, 남편이 유학 시절에 다녔던 교회였다. 유학생이었던 남편의 모습을 기억하는 어르신들도 있었고,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지인들도 만났다. 모두들 우리 가족을 반기면서 “잘 왔다.", “오느라고 고생했다." 하며 챙겨주니 오랜만에 친적집을 방문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동안 우리 가족은 교회의 중점 관심 대상자가 되었는데, 너무 많은 관심과 질문에 가끔은 정밀한 호구 조사를 당하는 느낌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모두들 이민 선배들이고, 같은 한국 사람들이니까 하는 생각에 모든 것을 좋게 생각하고, 고맙게 여겼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덧 봄이 지나고 초여름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한국에서 도착한 이삿짐을 기본으로 우리 가족의 공간을 만들어갔다. 차도 사고, 가구도 사고, 다양한 생활 용품도 사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은 정말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았다. 딸은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남편은 지인을 통해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직장을 구했는데, 영국에서 하려는 일과 병행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정기적인 수입도 생기게 되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영국에 왔을 때는 모든 것이 여유로웠다. 시간에 구애받는 일도 없었고, 생활비 명목으로 챙겨 온 목돈으로 통장 잔고는 넉넉해 보였다. 그러나 더 이상 여행객이 아닌 일상으로 돌아오니, 아침에는 집에서 20분 정도 걸리는 학교까지 딸아이를 데려다주고, 오후 3시에는 데리고 오는 일을 반복해야 했고(영국은 중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보호자가 의무적으로 등하교 시에 동반해야 한다), 남편은 파트타임이었지만 생각보다 일이 많아서 매우 바빠졌다. 또한 초기 정착을 위한 크고 작은 지출들과 정기적으로 나가는 렌트비와 공과금, 생활비 등으로 통장 잔고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는데, 나중에는 잔액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이를 픽업하려고 학교 근처에 잠시 주차를 하고 돌아오니 갑자기 나타난 할머니가 우리 차가 자신의 집 입구를 막았다며 정색을 했다. 그렇게 화를 낼 정도로 주차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미안하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가 너무 심하게 화를 내서 황당했던 일도 생겼다. 또한 학교에서 만난 학부모들은 대부분이 친절하였지만, 인사를 해도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버리는 사람도 있어 당황스러웠다. 한인교회에서도 우리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들었고, 영국에서 제2의 가족과 같은 관계가 될 것 같은 그들과의 관계는 교회에서 만난 아는 사람들 정도로 농도가 옅어졌다. 영국의 많은 것들이 처음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딸아이는 학교에 가고,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아들과 나, 둘만 남았다. 아직까지 영국이 많이 어색한 나는 혼자서 아들을 데리고 나갈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고, 가끔씩 집 앞의 놀이터에 갔다 오기만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동네 사람이라도 만나면 간단히 인사만 하고 혹시나 더 얘기하자고 할까 봐 후다닥 집으로 들어왔다. 이제 영국의 예쁜 거리, 다양한 사람들, 신기한 것들은 없고, 조용한 주택가의 매일 똑같은 일상만이 눈에 들어왔다.
'저 아저씨는 아침마다 자전거로 출근하는구나'
'매일 함께 나가는 저 부부는 어디를 가는 걸까?'
'저 엄마는 매일 아들을 픽업해서 퇴근하는 것 같아'
'우리 옆집 아줌마는 딸이 둘인가 봐...'
그렇게 창밖의 사람들을 보고 있다가,
'나 지금 뭐 하는 거니?'
'너 이러려고 영국에 온 거야?'
'과연 내가 무엇을 하며 살 수 있을까?'
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날이 많아졌다. 아름답고, 좋게만 느껴졌던 영국이 갑자기 배우지도 않은 어려운 수학 문제를 던져 주고는 정해진 시간 안에 꼭 풀어야 하는데, 할 수 있겠냐고 나를 다그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영국이 설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