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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울 Mar 27. 2024

첫 회사 생활, 그리고 망가지기 시작한 나

남들과 비슷한 삶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2019년, 내 생애 첫 회사에 입사했다. 그때 내 인생은 실패했다자조하며 회사를 다녔던 것 같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부모님이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있는 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학교를 나왔지만 일명 '명문대'를 다니지 못했던 나에게 부모님은 실망하셨고, 역시 취업 문턱에서 대기업을 바라던 부모님의 기대와는 달리 나는 중소기업에 다니게 됐으니까. 나는 부모님의 기대치에 맞추는 것이 왜 그리 중요했을까. 난 부모님의 희생으로 내 어린 시절을 풍족하게 살았다는 감사함과 죄책감이 있었고, 그에 보답하는 방법이 그런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취업을 준비하며 나는 특별히 가고 싶은 회사나 부서가 없었다. 그럼에도 난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건가?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면 "다들 비슷해, 세상에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와 같은 조언이 뒤따랐다. 그냥 다들 그렇다고 하니 그게 정답인 줄 알았다. 그래서 졸업을 한 뒤에는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렇듯 회사원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꾸역꾸역 회사를 찾았다. 내가 잘 어필할 수 있을만한 회사와 업무를 찾았다. 나는 대학생 시절 광고 동아리에 속해 있었고, 기획이나 마케팅으로 이 경험을 어찌어찌 엮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호텔경영학과를 나와 관광통역안내사 영어 자격증이 있었으니, 영어 도슨트 업무를 겸하는 A 회사에 기획팀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롤을 경험해 볼 수 있겠다 생각했다. 또, 졸업 후 1년 정도의 공백이 있었으니 이쯤 되면 회사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회적인 압박도 있었다.


그렇게 들어간 회사는 신입을 그다지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 자리로 들어온 사람들이 줄줄이 나가 1년 만에 5명 정도가 퇴사했다고 한다. 나 역시 금방 퇴사할 거라고 여겼는지 먼저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도 드물었고, 워낙 곁을 주지 않아 업무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려웠다. 그저 그들만의 세계에 내가 어색하게 끼여있는 기분이었다. 워낙 연차가 오래된 선배들이 많았고, 그들만의 끈끈한 허물 수 없는 벽이 있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란 쉽지 않았다. 회사는 친목 단체가 아니라지만 사람들에게 정을 붙여야 내가 회사에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아 가까워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렇게 나는 회사에 적응해 갔지만, 조금씩 내가 고장 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내가 고장 나기 시작했다


출근한 지 1달이 되었을 무렵, 회사 로비로 출근을 하면 이상하게 물이 찬 것처럼 귀가 먹먹해지는 증상이 생겼다. 우리 업무는 조금 특이해서 사무 업무와 고객 응대를 번갈아가며 진행했다. 고객 응대를 할 때는 무전기 착용이 필수였는데, 귀가 먹먹한 탓에 선배들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업무에 지장이 가기 시작하니 틈이 날 때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4-5군데를 돌아다녔지만, 모두 이상이 없다는 소견만 말씀해 주셨다. 그때는 그 원인을 몰랐는데 지금은 알 것 같다.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마음의 병.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집을 나설 때부터 귀가 먹먹해졌고 그 증상은 3개월 넘게 지속됐다. 하지만 딱히 원인을 몰라, 나는 그저 버텨냈다.


인턴 기간이 끝나고 나는 기획팀으로 들어갔다. 팀 분위기 자체가 아주 작은 실수라도 품어주는 법이 없었고, 다른 팀이 함께 있는 사무 공간에서 나의 실수를 까발리고 조롱하는 말도 종종 들었다. 카톡을 회사 메신저로 사용하는 곳이었는데 쉬는 날에도 단톡방에 종종 나를 태그 했고, 혹여 메신저를 놓치는 날이면 쉬는 날이었다 말해도 어김없이 질책 어린 말이 날아왔다. 덕분에 쉬는 날에도 메신저 말을 놓치진 않을까 종종거리게 됐다. 원래도 강박적인 성격을 가진 나인데 더더욱 강박적인 성향을 갖게 됐다. 물론 따뜻하게 대해주는 좋은 선배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좋은 순간보다 나쁜 순간들이 나에게 쉽게, 더 많이 각인되어 나를 괴롭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출근을 하기 위해 지하철에 내 몸을 욱여넣고 있는데 갑자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달리 도리가 없어 고개를 숙이고 심장을 두드리며 의자 옆 쇠막대를 잡고는 주저앉았다. 정신이 몽롱하고 주변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옆에 앉아있던 남성분이 나를 발견하셨는지 자리를 양보해 주셨다. 감사하다는 말도 전하지 못한 채 의자에 앉아 멍하니 호흡을 골랐다. 잠시 후 조금 정신이 돌아온 내가 옆에 있던 남성 분께 감사 인사를 전하자, 본인은 그 사람이 아니라며 그분은 이미 내리신 것 같다고 하셨다. "아, 그렇군요." 짧게 답변하고는 멋쩍게 웃었다. 조금 전만 해도 죽을 것 같았는데, 금방 괜찮아진 게 민망했던 탓이다.



나약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


나에게는 회사에 가는 매일매일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다. 평소에 욕을 거의 하지 않는 나인데,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욕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내가 나에게 놀라 입을 급히 다물었다. 내가 미친 건가, 생각했다. 일을 하다가 문득 눈물 날 것 같은 순간이 오기도 했다. 그럴 땐 화장실로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다들 잘 견디며 사는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라는 물음이 머릿속에 수도 없이 맴돌았다. 그럼에도 여기서 그만두면 나는 그저 '나약한 인간'이 될 것 같아 차마 그만두지 못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1년이라도 채우기 위해 다니다가 코로나가 터졌다. 회사의 사정은 안 좋아졌고, 더 이상 일다운 일을 하지 못하는 시기가 오자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회사에 다닌 지 9개월 만이었다. 부모님께서 만류하실 걸 알았기에 그냥 통보하듯 말씀드렸고, 부모님은 딱히 달가워하지는 않으셨지만 별 말없이 받아들이셨다.


그렇게 1년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영상 제작 수업을 듣고, 공모전에 나가고, 블로그와 유튜브 등을 키우면서 디지털 노마드로 살기 위해 여러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나는 그 경험으로 고정적인 수입을 만드는 방법을 몰랐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에 더욱 마음은 불안하고 조급해졌다. 불안감이 심해질 때면 나는 종종 이전 회사에 대한 악몽을 꿨다. 주로 업무에 대한 실수로 질책받는 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꿈에서 깰 때면 내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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