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주스가 흐르는 강
아빠는 과일을 참 좋아하셨다.
겨울이면 매일같이 퇴근길에 집 앞 과일 가게에 들러 감귤 한 봉지를 품에 안고 오셨고, 봄이면 가끔 새빨간 딸기 한 바구니로 우리를 설레게 했다.
여름은 우리 집에 달콤하고 싱그러운 과일 향이 가득한 특별한 계절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실과 주방에는 계절의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 있었다. 수박, 참외, 포도, 자두 같은 제철 과일들이 냉장고에 늘 가득했고, 식탁 위에는 언제나 과일이 담긴 그릇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의 잔소리로 가득한 계절이기도 했다.
한숨을 쉬시며 "우리 형편에 매일 이런 걸 사 오면 어떡해요? 과일 값이 만만치 않은데…"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빠는 못 들은 척 나를 향해 윙크를 날리곤 하셨다.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는 몰랐지만, 시골에서만 맛볼 수 있는 산딸기, 머루, 다래, 으름 같은 산열매에는 아빠의 어린 시절이 담겨있는 듯했다.
엄마는 "그런 거 먹으면 배탈 난다"며 걱정스레 말씀하셨지만, 아빠는 눈가에 미소를 머금고 "이런 과일이 더 맛있어"라며 정성스레 씻어서 건네주셨다.
사실 당시에는 그 산열매들은 과일가게의 반듯하고 예쁜 과일들만큼 달콤하진 않았다. 신맛이 강했고, 떫기도 했다. 과즙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 과일을 먹을 때마다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 반짝이던 아빠의 눈빛에, 나는 "맛있어요, 정말 최고예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빠처럼 과일을 참 좋아한다.
과일에는 다른 음식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달콤함, 신맛, 쌉쌀함이 모두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과일 하나하나가 품은 특별한 향기는 어떤 꽃향기보다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나는 아빠가 많이 아프셨던 때, 아홉 살 생일에 선물로 주신 목걸이를 지금도 항상 걸고 다닌다.
아빠는 그때 내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이 목걸이는 과일나라 요정이 준 특별한 선물이란다. 아빠는 지금껏 이 목걸이에 대한 비밀을 지켜야만 했어. 우리 사랑스러운 딸에게조차 말이지…….”
아빠는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눈을 반짝이셨다.
"이 수정 속에는 과일나라로 가는 마법이 숨어 있어. 하지만 그 마법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쓸 수 있다고 했어. 그리고 과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보인다고 하더구나."
당시에는 그저 아빠가 들려주는 재미있는 동화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목걸이의 수정이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날 때마다, 정말로 과일나라의 마법이 깃들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나는 어른이 되었고, 아빠가 무척 보고 싶던 어느 날, 홀로 할머니 댁을 찾았다.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돌아가시고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이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나요?"
"아, 네. 저기 골목 끝에서 왼쪽으로 돌아서 20분 정도 걸어가면 폐교가 있어요. 지금은 아이들이 없어서..."
"혹시 그 길에 과수원도 있나요?"
"네, 맞아요. 학교 가는 길에 오래된 과수원이 하나 있죠. 예전에는 사과도 많이 열렸는데, 지금은 관리가 잘 안 돼서......"
"감사합니다."
나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그 과수원에 다시 서 있다.
아이들의 발걸음이 끊긴 폐교와, 그곳으로 가는 길가에 자리 잡은 유일한 과수원. 틀림없이 바로 이곳이다.
그때는 너무 어렸던 탓에 선명한 기억은 없지만, 이제는 희미하게 떠오른다. 아빠는 걸음마를 막 시작한 나를 안고 이 과수원 앞에 오래도록 서 계시다가 돌아서곤 하셨다.
이 오래된 나무들은 아직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까?
구부정한 가지 사이로 듬성듬성 매달린 사과들이 마치 오랜 친구처럼 나를 반긴다.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아빠…….
그때, 마치 무언가를 예감하듯 공기가 살며시 일렁였고, 한 마리 나비—아니, 나비를 닮은 무언가가 날아왔다.
목에 걸린 수정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너! 심온이니?"
반짝이는 사과 잎사귀 모양의 날개를 가진 아름다운 작은 생명체가 은은한 빛을 내며 내 눈앞에서 요란하게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