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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기 Jun 27. 2022

수많은 생명이 내 손에 죽어갔다 - 반려식물기르기


내 손에 죽어간 식물이 몇이던가. 나는 죄인이오.


식물을 기르면 정서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하던데, 누가 봐도 불안정했던 내 정서 상태 때문인지 주위에서 선물로 식물을 많이도 안겨줬다. 대학교 1학년 때 선물로 받은 작은 선인장부터 결혼 후에 남편이 사준 꽃까지 무수한 식물이 내 품에서 죽어갔다. 


첫 번째 선인장은 조그맣고 토실토실해서 작은 내 방에서 친구가 되어주었지만, 집 밖의 친구들에게 더 현혹되어버린 나는 선인장 친구를 잊고 말았다. 초보자가 자꾸 물을 주다 과습으로 상하곤 한다던 선인장이, 사막에서도 살아남는 선인장이, 내 방에서는 삭막하게 말라서 죽었다.


두 번째로 맞은 율마는 분명히 3~4일에 한 번씩 물을 주라는 조언과 함께 선물 받았다. 착실하게 3~4일에 한 번씩 물을 주었고, 율마는 과습으로 저세상으로 떠났다. 


세 번째로 키운 스파티필름은 무사하게도 무럭무럭 잘 자라났다. 너무 무럭무럭 잘 자란 나머지 분갈이라는 것에 욕심을 내게 되었고, 분갈이 직후부터 시들시들하던 놈도 결국 떠났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꽃 화분 몇 개와 허브까지 보내고 나서 이제는 내 인생에 더 이상의 살생은 없다고 선언하며 식물을 끊기로 했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나는 지나치게 동물적이다. 볕이 잘 드는 지금 집으로 이사한 직후 베란다에 상추를 심었고, 다행히 상추는 쑥쑥 자라 몇 번이나 수확하고 꽃을 피우고 씨앗까지 맺었다.


상추 때문에 방심했다. 봄의 꽃집에서 화분을 다시 탐내기 시작했고, 남편은 - 진짜진짜 마지막이라고 당부했지만 역시나 살식물의 공범일지도 모른다 - 오렌지 환타 색 예쁜 꽃이 달린 식물, 크로산드라를 선물했다. 


크로산드라는 강했다. 한여름의 뙤약볕에도 타지 않았고, 가끔 물을 늦게 줘도 잎 끝이 조금 마를 뿐, 금세 다시 힘을 찾았다. 조금 물이 과했나 싶어서 그냥 두면 알아서 천천히 물을 다 빨아먹고 다시 힘을 냈다. 


복병은 따로 있었는데, 벌레의 습격이었다. 처음에는 꽃집에서부터 따라온 민달팽이가 문제였다. 접시에 맥주를 담아두기도 하고 새벽마다 화분을 들춰가며 보이는 대로 잡아냈다. 겨우 민달팽이를 잡았더니 흰가루이가 화분을 덮었다. 잎을 하나하나 닦고 씻어내고 약을 쳐도 며칠 뒤면 다시 흰가루이가 붙어있었다. 거기다 마침내 뿌리파리까지! 눈물을 머금고 화분을 엎었다.


흙을 갈고 상한 잎을 다 떼었다. 크로산드라 세 줄기 중에 두 줄기는 이미 성한 잎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 상태가 나은 한 줄기만 다시 화분에 심었다. 내 손에 죽어간 지난 식물들이 떠올라 착잡했다.


하지만 크로산드라는 강했다. 잎사귀 5장만 남았던 작고 가는 줄기에서는 새순이 하나씩 올라왔고, 줄기가 잘렸던 곁에서 새 줄기를 뻗어갔다. 씩씩하게 자라나서 올해 초부터는 다시 꽃대를 올리기 시작했다. 기특하고 대견하고 감사하다.



장식하기는 쉽지만 키우는 건 다를 수도

인테리어에 어울리는 식물을 장식하고 수형이 잘 잡힌 멋진 화분을 들여놓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식물이 건강하게 잘 자라며 사는 것은 신경 쓸 것이 많다. 적당한 햇빛과 신선하게 흐르는 공기가 필요하고, 계절에 맞춰 적절한 온도를 알아둬야 한다. 건강이 괜찮은지 확인하기 위해 잎의 색이 변하거나 반점이 생기지는 않는지, 흙에서 버섯이나 곰팡이가 생기진 않는지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줄 아는 사랑이 필요하다

식물에 애정이 넘쳐흘러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은 나머지 물을 많이 주다 과습으로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상태가 나빠 보인다고 이런저런 좋다는 것들을 뿌리다 되려 식물이 몸살을 앓기도 한다. 하지만 식물들이 원하는 건 언제나 적당히인 것 같다. 내가 키우는 식물에게 적당한 조건이 무엇인지 공부하고 쾌적한 상태를 제공해 주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지만, 그 후에는 스스로 뿌리내리고 잎을 뻗어내는 식물의 힘을 믿고 차분히 기다려주자. 


무관심이 식물을 말라죽게 한다면, 조급함은 식물을 지치게 한다. 식물의 자가치유력과 생명력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기도 한다. 다만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니 고요하고 차분하게 식물과 함께 시간을 보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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