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십이월 Sep 01. 2022

다시 그날 아침의 2분

설레는 발걸음


다시 그날 아침의 2분

설레는 발걸음




오늘도 나는 병원에 있다. 유난히 이른 병원의 저녁밥을 먹고 외래가 끝나 한산해진 1층, 지하 1층으로 산책을 다녀왔다. 오는 길에 유모차를 탄 소아 환자들을 몇 명 만났고, 씩씩하게 주사 폴대를 밀고 가는 나처럼 머리카락이 없는 아이도 봤다.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러 가는 길인지 아이의 걸음에 설렘이 묻어나 가슴이 먹먹했다.  마지막까지 어떤 길이든 저렇게 설레는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도, 나도 모두.



다시 그날 아침의 2분을 떠올려 보면 좀 민망하기도 하다. 별 것 아닌 일에 왜 그리 격양되었을까? 그래도 그날 아침의 격양이 결국 용기가 되었고 여기까지 오게 됐다. 설레는 발걸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어느 글에도 실지 못 했던 남은 세 편의 시를 모았다. 우연히도 아주 오래전 시들이 끝까지 남아 있었다.


이제 내 책상 서랍의 오래 묵은 시들은 거의 다 꺼내 냈다. 아직도 고민스러운 몇몇 작품이 남아 있지만 우선은 이번 세 편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매거진을 어떻게 할 것인지 오래 망설였다. 이쯤에서 매듭을 짓는 것도 좋을 것 같고, 그래도 아쉬워 열어 놓고 싶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쓴 시는 [겸허한 겁쟁이]의 ‘무섭다’에 삽입된 ‘자꾸만 얇아지고 있다’로 시작하는 소품이다. 그것도 이미 4년 전쯤의 작품이고, 치병 중에는 단 한 작품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매거진은 결국 열어놓는 쪽으로 결정했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1주에 한 번씩 발행하며 한 번에 3편 정도의 시를 실었다. 앞으로는 부정기적으로 새로운 창작품이 있거나 서랍 속의 낙오작들 중 수정 보완해 완성시킨 작품이 생길 때 발행할 생각이다.








찬밥



찬밥 한술 물에 말아먹어봤니?

그렇게 말갛고 밍밍하게

꾸역꾸역 넘어가는 대낮의 시간들

그 가운데 오도카니 앉아서

알알이 흩어지는 밥알들

속절없이 쳐다본 적 있니?

식을수록 뭉쳐서 풀어지지 않는

밥 덩어리. 그 된밥 한 덩어리 목에 걸려

물 만 밥 먹다 목메어 본 적 있니?


찬밥 한술 물에 말아먹어봤니?

그렇게 말갛고 밍밍하게

꾸역꾸역 얹혀 오는 대낮의 시간들

그 가운데 오도카니 앉아서

알알이 흩어지는 밥알들

공들여 꼭꼭 씹어본 적 있니?

불어 터진 밥알에서 감질나게 녹아 나오는

단맛, 그 단맛이 가슴에 사무쳐

물 만 밥 먹다 목 놓아 울어본 적 있니?


그럴 땐 왼손 약지의 반지를 빼고

엄지를 말아 주먹을 쥐고서

쇠골 아래 가슴을 쳐.

쿵 쿵 쿵

이렇게 세 번만       

 

찬밥 한술 물에 말아먹고 나서는

그 말갛고 밍밍한 물

고슬고슬 마르도록 오래오래

햇빛 아래 나앉아 있어.




 


 

소풍(逍風)

 

- 내 안의 아이가 울며 보채는 날

  나는 너의 손을 잡고

  소풍을 가리라 -


소풍 가자.

날도 좋은데

김밥 싸가지고 소풍 가자.


오늘의 참회는 내일로 미뤄두고

내일의 회한은 아주 잊어버리고


단무지는 없어.

오이는 시들었고

당근은 동강동강 토막을 내놨어.

맛살도 없어,

햄은 유통기한이 지났고.

지단을 부치기엔 시간이 없어.


그래도 괜찮아.

그래도 상관없어.

바람이 좋으니까 햇빛이 좋으니까

그래. 괜찮아, 상관없어.


간간한 밥 한 주걱 참기름에 비벼

얼 구운 김에 돌돌 말아야지.

터지지 않게 풀리지 않게

꾹꾹 눌러 잘 말아야지.


소풍 가자.

오늘같이 좋은 날

김밥 싸가지고 소풍 가자.

너랑 나랑 둘이서 가자.


오늘 못 가면 내일은 못 갈 소풍

지금 못 가면 영영 못 갈

소풍 가자.





 

축원


이제 주무세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듣지 말고, 아무것도 보지 말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어린양 한 마리

생각의 산에 풀어

산기슭에서 근심의 풀을 뜯어먹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저 그만그만하다고

따지고 보니 별 것 아니라고

메헤헤 메헤헤


어린양 두 마리

생각의 산에 풀어

산비탈에서 후회의 풀을 뜯어먹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만하길 다행이라고

따지고 보니 별 것 아니라고

메헤헤 메헤헤


어린양 세 마리

생각의 산에 풀어

산허리에서 원망의 풀을 뜯어먹습니다.

고쳐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따지고 보니 별 것 아니라고

메헤헤 메헤헤


어린양 네 마리

생각의 산에 풀어

산마루에서 미련의 풀을 뜯어먹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만하면 됐다고

따지고 보니 별 것 아니라고

메헤헤 메헤헤


어린양 다섯 마리

생각의 산에 풀어

산정에서 욕망의 풀을 뜯어먹습니다.

자꾸 생각하다 보니 꼭 그럴 것은 없다고

따지고 보니 별 것 아니라고

메헤헤 메헤헤


이제 주무세요.

배부른 어린양들은 모두 우리에 들었고

산은 고요합니다.

내일이면 다시 무성하게 풀 자랄지라도

이제 그만 주무세요.

 



*이 지루하고 우울한 글들을 발행 때마다 찾아 읽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혹시 제가 이후에 단 한 작품이라도 시를 더 쓸 수 있다면 그건 모두 여러 분의 격려 덕분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