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빠는 왜 나와 대화를 끊었을까

상처와 위로, 폭력과 연민 사이에서 아버지를 이해해 보려는 나의 기록

by 연하나

통증을 이야기할 때, 나의 아버지를 빼놓을 수 있을까. 그는 내 고통의 시작이자 끝 어딘가에 늘 있었다.




입 안에는 쌉싸름한 커피 향이 가득 맴돌았다.
카페 주인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거의 매일 이른 오후까지 이곳에는 나 혼자뿐이다.
음악과, 내 키보드 소리가 조용히 자리했다.

글을 쓰려고 과거를 떠올리는 내 마음속은, 이 고요함과 다르게 요란했다.


요 며칠, 몸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통증이 슬며시 깨어나 퍼지고 있었다.


지금의 고통을 내어 그 실체를 보고 싶다.


마치 어느 미생물의 변화를 관측하는 과학자처럼, 어린 시절 나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과거를 반추하며 쓰는 건, 지금의 삶을 부정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아물지 못한 것 같은 내 상처들이 치유되길 바라는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품고 있어서이다.

희망과 절망은 한 끗 차이라고 하지 않았나,

젊은 날의 나는 절망에 가까이 서있었다면,

불혹이 된 지금 나는 기어코, 희망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상처들이 다 아물고 딱지로 떨어져 나간 말끔한 모습으로,

희망이 곁을 내줄 때까지 바짝 붙어 있고 싶다.


다시금 눈을 감고 더듬어본다.

언제 어디서부터 아프게 되었는지.


어느 노련한 상담사를 찾아온 내담자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방 안에 앉을자리를 찾는다.

수줍고도 망설이는 모습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를 한다.

그 내담자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리는 것 같다.


우리 아버지는 손가락 절단 사고를 겪은 산재 대상자였다


아버지는 내게 사고는 한순간이었지만, 수치심은 평생 간다고 하셨다.


그는 사람 많은 곳에선 늘 손을 주머니에 넣으셨고, 글씨도 예쁘게 쓰지 못하셨다.

검지가 한 마디 없는 손은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를 이곳저곳 서툴어 보이게 했다.


어린 시절, 나는 잠이 잘 오지 않는 아이였고, 아버지는 말이 많은 어른이었다.
작은 집 마루에 앉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아빠, 손가락은 왜 그렇게 된 거예요? 왜 다시 못 붙였어요?”


“갑작스러운 사고였어. 휴지로 급하게 지혈하고,

같이 있던 사람이 떨어져 나간 손가락을 종이컵에 담아 병원에 가져오긴 했는데...

이미 늦었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환상통’이라는 말도 아버지를 통해 처음 알았다.
가끔 손가락이 여전히 있는 것 같다고, 그게 뭔가 싶어 찾아봤더니 ‘환상통’이라는 이름이 있더라고 하셨다.


절단된 아버지의 손가락 끝누런색의 딱딱해 보이는 겉은 살로 덮여 있었고,

마치 뭉툭하게 다듬어진 나뭇가지 같기도 했다.

그것을 만져보고 싶었지만, 그의 불운이 나에게로 옮겨 붙기라도 할까 봐, 눈으로만 가만히 보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손가락을 향한 나의 눈길을 보고, 화제를 돌리셨다.

가수 나훈아 이야기였다.

그가 지금까지 몇 곡이나 발표했는지 다 외운다며, 손글씨로 빼곡하게 적힌 노트를 내미셨다.


아버지는 내게 시험을 내달라고 하셨다. 자신도 얼마나 아는지 궁금하다고.

내가 제목을 말하면, 아버지가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시는 식이었다.
애처로운 트로트 가락 위에 아버지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얹어지자,

나는 어쩐지 서글퍼졌다.


아버지는 나훈아의 모든 노래의 가사를 토시 하나 빼지 않고 다 외우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음정도 박자도 내가 여태 들은 노래 그대로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없을 때 내게 그런 걸 ‘쓸데없는 일’이라고 하셨다.
돈도 안 되는 일에 왜 그렇게 공을 들이느냐고.


가난은 모든 것에 쓸모를 재단하게 했다.

돈이 되냐, 안 되냐. 그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기호라든가, 꿈이라는 건, 모두 가난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 옛날, 아버지의 기타가 큰형에게 부서졌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라고 하셨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음악을 줄곧 좋아하셨다.

우리 집은 날마다 아침부터 오래된 전축에서 흘러나온 음악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3평 남짓한 거실 없는 안방 한편, 커다란 전축이 꿰차고 있었다.

세월의 풍파 속, 달동네까지 이고 지고 가져온 기계는 아버지가 가진 가구 중에 가장 값비싼 것이었다.

그 기계는 선명하고 깔끔한 소리를 내며,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학교에 가기 위해 가방을 멜 때도, 밥을 먹으려고 밥상을 펼 때도,

*하바 나길라~ 하바 나길라~ 베니스메하~

시도 때도 없이 음악이 울려 퍼졌다.


나의 어린 시절, 집안에서 찍은 사진들의 주변은 조금씩 달라졌을지라도,

그 하얗고 웅장하기까지 한 전축만은 인도의 타지마할 궁전처럼 그렇게 자랑할만한 배경으로 우뚝 서있었다.


LP판과 테이프가 빼곡히 꽂힌 선반도 있었다.


핸드폰도 없던 그 시절, 무료한 시간이 되면 나는 전축 옆 선반 앞에 앉아 음반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보곤 했다.


영국의 록밴드, 브라질 대중가요, 아프리카의 전통음악, 세계음악 그리고 전영록, 최백호, 남진, 나훈아까지…
녹록지 않았던 그의 삶에서 음악은, 확실한 위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조금은 특이한 영화 취향도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대중성 없는 예술영화를 좋아하고, 소시민의 이야기를 조용히 담아낸 영상에 끌리는 것도.


주말이 되면, 늦은 오후에 나는 아버지 옆에서 영화를 보다 노곤하게 잠들곤 했다.


화면이 점점 흐려지며 달콤한 잠에 빠져들면 영화 장면이 현실이 되고 내가 있는 곳이 비현실이 되는 마법이 펼쳐지곤 했다.

그건 분명, 잠깐의 휴식이었다.




‘불안정애착’이라는 나의 애착 유형도, 어쩌면 아버지의 영향일지 모른다.


솔메이트처럼 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나누던 아버지가, 어느 순간엔 매를 드는 사람이 되곤 했다.


친구 같던 사람이 맹수처럼 돌변하여 폭력을 휘두를 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날, 내가 잠이 들면 아버지는 내게 “아이고, 아팠겠다”하고 속삭였다.

자신에게 맞아서 붉게 물든 내 피부에 약을 발라주셨다.

그 속삭임과 손길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나의 행동이 맞을 만한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랑의 매라는 말은 말 자체가 모순이라 생각했다.
매는 그저 폭력이었다.
나는 짐승이 아니었고, 아팠고, 어렸다.

그 사실만, 뚜렷했다.

어린 시절, 무심하지만 한결같던 엄마와 달리, 아버지는 내게 관심이 많고 자상했다.


하지만 내가 청소년시절에 접어들면서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스무 살이 넘고 한참 지난 어느 날부터는
아버지와 시답잖은 농담뿐만 아니라

어떤 대화도 더는 나누지 않게 되었다.


우리 집은 어느 때보다 적막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아파트로 이사 올 때에 그 하얀 궁전 같았던 전축을 팔아 버리고 왔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버지의 벌이가 예전 같지 않아서였을까,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아서였을까. 돈에 더욱 집착하셨고 인생을 한탄하셨다.


내가 대학에 가는 것도 반대할 만큼.


아버지는 집안 모든 것에 염증이 난 사람처럼 행동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술냄새를 짙게 풍기며 신세한탄 같은 말을 토해냈다.

아무리 게워내도, 끝이 없는 토악질이 1시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그쯤 나는 아르바이트와 학업에 지쳐있었다.

집안에 절여진 술냄새와 토 냄새에 나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정말이지 조용히 쉬고 싶었다.


우리는 크게 다투게 되었다.

한 밤중이었고 이웃 사람들까지 와서 말려야 할 정도였다.


예민하고,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던 아버지의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나.
감춰도 좋을 감정들까지도 모두 자식인 나에게 쏟아내던 아버지.


그때의 혼란은 여전히 내 곁에 고스란히 머물러있다.


사람 사이에서 자주 멈칫하게 돼버린 건 그래서였을까.

다정한 얼굴 뒤에 숨은 폭력을 예민하게 감지한다.

안전한 사람만 내 방에 들이기 위해 살펴 노력한다.


이제, 내담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한다. 붉게 상기된 볼과 물기 어린 얼굴을 하고서 일어섰다.


독백인 줄 알고 뱉었던 단어들은 바람에 나부껴 던져진 속옷들처럼 하찮고 초라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창밖은 푸르고 노란 빛깔 노을이 내려앉았다. 카페에 들어선 이름 모를 사람들은 이른 저녁의 비릿한 공기를 지니고 왔다.


멈춰 조용히 흐르던 시간은 사람들의 북적거림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나의 마음도 아버지를 향해 나아갔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연민하는 마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달그락 거리는 커피잔 소리,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낱 배경음으로 전락한 노래의 선율. 하바 나길라, 하바 나길라, 베니스 메하~
기쁨으로 환호하며 부르던, 유대인들의 음성이 잦아들었다.


우리가 사랑하던 그 음악이 색을 잃어갔다.

.

.

.

나는 아직도 선택하지 못한다.


... 사랑할지 말지...


아버지도, 나도

결정짓지 못한다.









**하바 나길라〈Hava Nagila〉**는 유대인의 민속 음악

Hava nagila ve-nismeḥa 히브리어 : 우리 기뻐하자, 즐거워하자! (가사 출처: chatGPT.)

keyword
이전 06화아직도 운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