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악마가 되지 않기로 했다
세상에 숨어있는 작은 악마들을 위하여,
이런 이야기까지는 꺼내고 싶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이 5월이라서가 아니다. 어린이라는 상징성, 천사니, 희망이니, 순수성이니 하는 것들을 지켜주고 싶었다. 세상에 그런 존재가 있다는 건 어쩐지 위로가 되는 일이니까.
그렇지만 글을 써 내려갈수록, 그러니까 통증을 제대로 알기 위해, 나의 상념은 근원으로 번져갔고 ,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마주 보라고 말해주었다. 괜찮아, 뭐든 이야기하라고 다독였다.
어린 시절, 나는 어른이 부재한 세계에 살았다.
이 글은 '모두가 잠든'으로 시작되는 피터팬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어른 모두가 일하러 가고 벌건 대낮에 남겨진 아이들의 이야기다.
나에게 아직도 가슴 깊은 곳 흉터로 새겨진 사건을 떠올려 본다.
사건의 배경이 되는 곳은 우리 집이었다. 부산 어딘가로 피난온 사람들이 형편 닿는 대로 움집이며 판잣집을 지어 생겨난 동네.
세월이 흘러 벽돌과 샷시로 지어진 집들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어딘가 울퉁불퉁 덧대어진 엉성한 모습 그대로인 곳이었다. 이렇게 무허가로 들어선 집들이 산 골짜기에 층층 이어졌다.
저마다 취향의 색으로 칠해진 작은 집들,
알록달록 색색의 외벽들이 뒤엉켜 특유의 생경한 풍경을 만들었다.
멀리서 보아야 아름다운 곳,
얇은 슬레이트 지붕아래 옅은 파란색으로 칠해진 작은 집, 그곳 우리 집에서였다.
늦은 오후였지만, 여름의 태양은 여전히 하늘 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낱낱이 비추고 있었다.
한적하던 골목길에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슬리퍼 끄는 소리가 유리문 넘어 소란스러웠다.
바깥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낯선 여자아이의 목소리다. 경고장 같은 목소리.
분명 나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이는 어느 여자아이의 목소리다.
나는 입술에 힘을 주고 물었다.
“누구세요?”
“나와 봐.”
문을 거칠게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문 너머, 두 명의 실루엣이 유령처럼 어른 거렸다.
반응이 없자 그들은 문을 발로 쾅쾅 차기 시작했다. '아, 저게 얼만데'하고 생각했다.
내가 엄마에게 혼날 거야 하고,
여자아이 두 명이 나를 노려보고 서있었다.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중 하나는 같은 반이지만 친하지 않은 아이였고,
다른 하나는 그 애의 언니쯤 되어 보이는 중학생 여자아이였다.
긴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지닌 얼마 전 전학 온 아이,
엄마 없이 아빠랑만 살고, 아빠마저 자주 현장 일로 며칠씩 집을 비워 자기들끼리만 산다는 자매들이었다.
“너 우리 동생이 만만하다며? 웃긴다며? 진짜 그래?”
그 언니는 신발을 신은 채 우리 집 마루 위로 올라왔다. 가까이서 나의 멱살을 잡기 위해서였다.
담배냄새가 났다. 남자 어른의 냄새가 훅하고 났다.
나는 너무 놀라 일순 얼어붙었다.
소리를 질러야 하나, 밀어내야 하나 망설였다.
고작,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신발은 벗고 올라와.”였다.
순간의 정적.
“웃기시네.”
그 여자는 내 머리채를 확 잡아챘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뿌리쳤지만,
이미 둘은 동시에 나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무슨 정신이었을까.
헐떡이며 소리를 질렀다.
“너무 비겁하잖아. 붙을 거면 1대 1로 해야지!”
얼굴과 복부를 향해 쏟아지는 손과 발.
그게 친구의 것인지, 언니의 것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나도 정신없이 손과 발을 휘둘렀다.
폭풍이 휘몰아치고 난 뒤,
잠잠해진 마루엔 검은 신발 자국이 엉켜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마루 옆 부엌에는 아빠가 면도하시며 들여다보는 작은 거울이 걸려있었다.
헝클어진 머리, 눈물과 콧물이 뒤섞인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비쳤다.
거기, 나 혼자였으면 차라리 좋았을까.
그때, 우리 집에 놀러 와있던 친구들의 검은 속삭임이 희미하게 들렸다.
마루와 바로 연결된 작은 방 유리문 너머, 나의 작은 악마들이 앉아 있었다.
문을 열면, 어떤 얼굴을 하고 그들을 마주해야 할까.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마루 한편에 있던 걸레를 들어 바닥을 닦았다.
엄마가 알면 혼날 거야 하고 생각했다. 손에는 시큼한 걸레 냄새가 났다.
나의 작은 악마들,
그들은 조용히, 방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마른 손으로 얼굴을 훔치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방문을 열고
다시 그들과 놀았을 까.
아니면, 내가 그들 앞에서 마냥 울고만 있었을
까.
정말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건, 그 이후로
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온전히 쏟지 않기로 했다.
사람들의 껍데기의 한 면, 그걸 상대하기로 했다.
다 내어주지 않는다. 그것이 날 지키는 방법이고 덜 무너지는 쪽이다.
3명이었지. 모두가 그런 건 아니야. 그렇지만 우리 반에서 나와 가장 친한 3명이었지.
그들은 내게 분명히 가르쳐 주었다.
사람을 믿어선 안 돼.
스스로를 지켜.
너는 혼자야.
그때 그 후로도 날 외면했던 친구들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내고 있었다.
내 마음속이 어떠하든 나는 그들과 장난을 치고 웃고, 그렇게 지냈다.
그 사건을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어느 날이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날들 중 하루.
태양은 어느새 자리를 내어주어 땅거미가 내려앉은 시간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일을 나가고, 거리에 맡겨진 아이들은 여전히 나쁜 짓을 했다.
나는 골목 어귀에서 어느 여자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무슨 소리지?’ 하고, 살며시 다가갔다.
남자아이 셋이 우리 반 여자아이의 몸을 희롱하고 웃고 있었다. 그 여자아이는 지체장애가 있는 아이였다.
나는 생각했다.
나도 작은 악마가 되어, 인생의 진리 같은 것을 그 아이에게 알려줄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날, 거울 속 붉게 상기된 얼굴의 여자아이가 속삭였다.
절대 그러면 안 돼.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있던 돌멩이를 집어 들고, 뛰어들었다.
남자애들에게 돌을 던졌다.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 나쁜 놈들아, 꺼져!”
남자애들은 놀라 흩어졌다.
그 애들을 쫓아내기엔 충분했다.
희롱당하던 여자아이는 울면서 풀썩 주저앉았다.
돌을 던졌던 내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가쁜 숨을 씩씩 몰아쉬었다.
그 여자아이는 나를 쳐다봤다.
나도 그 아이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 아이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나를 바라본 눈 안에 이미 많은 말을 품고 있었다.
나는 여자아이를 뒤로 하고 긴 한숨을 내뱉으며 돌아섰다.
나는 조용히 내게 말했다.
“용기 내줘서… 다행이야”
한끗이었다.
그들을 향해 소리 지르기 전 두렵고, 무서웠고, 갈등했다. 모른 척 뒤돌아 갈 수도 있었다.
나의 작은 악마들은 어리고 착한 얼굴을 하고 아직도 숨어 있다.
아이들은 여전히 거리에 맡겨져 있다.
아이들은 여전히 울고 있다.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견디는 아이들.
밝은 빛 아래 조금씩 천천히, 내 머릿속에서 시간의 조각들이 하나 둘 맞춰졌다.
흩어져 있어서 선명하지 않았던 상이 환하게 맺혔다.
그 거울 속 아이는, 붉게 상기된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된 얼굴 그대로였다.
그날, 거기 어린 나는 방문을 벌컥 열며 숨어 있던 친구들에게 소리 질렀다.
“너희들 어떻게 아무도, 한 명도 나오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