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람들 곁에 앉기까지의 여정
그날은 평소보다 더 볕이 좋았다. 오랜만에 맡는 봄 햇살의 내음은 세상을 따뜻하게 감쌌다.
나는 어수선한 집을 나와 아이와 손을 잡고 등원 길에 나섰다.
셔틀버스에 탄 아이에게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한동안 비가 추적거리며 날이 흐렸더랬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어있었다.
옆에서 손을 흔드는 이웃 언니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네었다. 우리는 이미 다섯 달 전에 얼굴을 튼 사이었다.
인사에서 시작해 수다가 길어졌다. 벌써 반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어느 카페에 앉아 따뜻한 커피라도 마시며 이야기할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우리는 요즘 날씨 참 변덕스럽죠 하며 날씨 하소연을 하다, 어느새 최근 유행하는 식단이 무엇이라는 말까지 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낸 그 자리에 서서, 대화를 이어갔다. 평소라면 짧게 인사말 정도 하고 헤어졌을 일이, 이렇게 길어졌네 하고 생각했다.
나는 집에 돌아갈 분위기를 띄웠다. 그때, 그녀는 내게 눈을 살짝 가늘게 떴고, 뾰족한 말을 조심스레 건넸다. 우리와 알고 지내는 동생 K에 대한 그녀의 말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을 좋아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이유 없이 행복해졌으니까, 목적 없이 만나, 가면을 벗고, 허물없이 대화하다 보면 나오는 진짜 웃음소리가 좋았다. 그렇지만 어른이 되면 안다. 그런 웃음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드물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더욱 그런 관계에 목말라 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며 서로 연락조차 어려운 오랜 친구들 대신, 새로운 친구관계를 맺고 싶었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잘 적응했어요?”
이웃언니와 K동생, 우리는 같은 아파트 살고 나이도 비슷해 보이고 나처럼 둘째도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 이들이었다. 친구가 되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들에게서 내가 찾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친절하다. 칭찬을 주고받고, 말에 쉽게 맞장구를 쳐준다. 그렇게 몇 개월, 만남이 잦게 되면 서로의 차이가 드러난다. 우리가 생각만큼 비슷하지 않구나 하고. 알고 보니 이런 사람이었어하고 경악하기도 한다.
그런 생각들이 켜켜이 쌓이고 무심코 다른 사람들과 그 일을 나누기도 한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야? 나만 불편했어? 하고.
그래,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리지만 실망은 한순간인 것을.
이웃 언니, K 그리고 나. 우리 관계가 이제 예전만 못하리라는 직감을 했다. 우리 모임은 빛났지만 잠깐 반짝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오랜 친구들을 떠올렸다. 학창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 그들과는 자주 만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했고, 서로를 알아주었다.
어쩌면 서로의 좋은 점을 동경하기에도 벅찼던, 순수하던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는 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이제, 이웃 친구들과 나는 불편 조각들의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저 그날이 자신에게 꽂히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관계에서 오는 사소한 실망들은 언제부터인가 마음에 생채기를 여기저기 내고 있었다. 겨우 낫고 나면 다시 덧나고.
그 상흔들은 희미하지만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밤잠 설쳐가며 내가 이 말을 왜 했지? 그 사람은 왜 그런 말을 나에게 했을까 하고 걱정하는 날들이 만든 흔적들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나는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자주 혼자이길 택했다.
혼자 맛집 가기, 혼자 카페에서 차 마시기, 혼자 글쓰기. 전보다 사람들을 적게 만나기로 했다.
어느 날, 동네친구에게서 안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며 연락이 왔다. 함께 조용하고 아늑한 카페를 찾았다. 우리는 여지없이 둘 다 카페라테를 마셨다. 우유를 머금은 커피 향이 진하게 났다. 창 너머 탁 트인 바다가 눈앞 가득 펼쳐져 있었다.
이전에 없던 편안한 마음이 잔잔히 밀려왔다. 그래, 나 여전히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그리워했구나, 외로워하고 있었구나 하고 문득 느꼈다.
나는 그녀에게 관계에서 오는 피로를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픈채팅에서 만난 사람들과 독서모임을 한지 이제 일 년이 넘었다고.
그녀의 독서모임에서는 같은 취향의 사람들이 주로 책에 대해서 말을 하다 보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했다.
나는 한달음에 오픈채팅방을 찾게 되었다. 우리 집 근처에서 만나는 독서모임을 간신히 찾게 되었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들과 만남이 괜스레 두려웠지만 한편으로 설렜다. 육아로 한동안 책과 멀어진 시간이 길었고, 내가 할 이야기가 있을 까도 싶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기우였다. 나는 그들과 책 이야기로 마음이 하나 되었다.
모임에서 중요한 건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도, 책을 얼마나 이해했는 지도 아니었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면 충분했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 작가를 동경하는 마음, 문장 속 지혜들이 사람사이를 오고 가며 가득 넘쳐흘렀다.
나는 사람들이 말한 책들의 제목을 노트에 적었고, 그들이 사랑하는 문장들에 의미와 경험을 깊이 들었다. 그 말들은 내 귓가에 오래 머물러도 좋았다.
나의 말에 따뜻한 시선으로 경청해 주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 시선은 어떤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되었다. 최근 이보다 더 몰입했던 순간이 있었나 하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글을 쓰고 조금 뒤면 또 다른 독서모임을 하게 된다. 1년 전 큰 수술을 받게 되었고, 두 달은 꼼짝없이 집에 있어야 했다.
독서모임에 갈 수 없다는 게 아픈 것보다 더 슬펐고 그렇게 알아본 온라인 모임이었다. 직접 어느 장소를 찾아가지 않아도 되었고, 복대를 차고 편하게 침대에 앉아 참여할 수 있었다.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배에 통증으로 조금 힘들면 양해를 구해 화면을 끄고 목소리만 참여하기도 했다.
온라인모임은 책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었다. 나라도 지역도 시간도 한계를 둘 필요가 없었다.
이토록 모임에 진심인 적이 있었나!
독서 모임은 내 삶의 활력이다. 사람들을 다시 사랑하게 된 이유.
나는 이제 닫아 놓았던 내 마음을 사람들을 향해 조금씩 열어보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