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프고 가장 아름다웠던 시작
너는 아주 작은 점일 뿐이었지만, 세상의 시작과 같은 소중한 빛이었지.
몇 주가 흐르고 마주한 너는 소리를 내었어.
두근두근 심장 박동 소리. 어떠한 악기 소리보다 황홀하고, 아름다운 소리였지.
우리는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 되어 있었어.
네가 찾아온 건 행운이라고 믿고 싶었지.
오랜 시간 느껴왔던 존재에 대한 회의감은 너로 인해 어느새 사라져 버렸어.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들 하잖아.
내가 짊어질 무게를 달갑게 받아들였어.
너는 눈을 꼭 감은 채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며 새까만 머리와 붉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났어.
아홉 달이었어.
너를 만나기 위해 기다린 나날들은, 짧은 듯했지만 오랜 기다림의 연속이었어.
어떤 날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그 흔한 진통제조차 먹지 않고 버텨야 했어.
숨이 꽉 막혀서 잠들지 못한 나날들이 있었고, 무언가가 빠질 것 같은 이름 모를 통증을 견디는 나날들도 있었지.
그 모든 날들은 너의 심장 박동 소리와 진흙으로 빚어 놓은 것 같은 흐릿한 너의 사진 한 장으로 버틸 수 있었어.
너를 낳기 위해 빌려진 손들은 내 배 위에 너를 올려놓았어.
묵직한 느낌. 나는 순간 뿌듯해졌어. 잘 견뎌낸 거야 하고.
우리 사이를 잇는 푸르고 보랏빛의 줄이 끊겼을 때, 너를 지탱하고 있던 태반이 훅 하고 빠져나왔을 때,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허전해졌지.
차가운 철의 질감이 두 다리를 타고 올라왔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진 배 가죽만 남아있었어.
너를 품기 위해 존재했던 것들은 찌꺼기가 되어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채였어.
깊게 내려앉은 통증은 온몸을 들 끌게 했어. 깔고 있던 이불은 식은땀으로 젖어버렸어.
헝클어져버린 머리카락처럼 혼란과 고통은 소용돌이쳤어. 눈물이 뜨겁게 달궈진 뺨을 타고 조용히 흘렀어.
너를 기다리는 시간들은 한 번도 혼자인적 없었던 것처럼 외로움을 몰고 왔지.
자주 눈물을 훔쳤야 했어. 나의 우울은 너의 탄생과 함께 다시 시작되었어.
네가 태어난 지 이틀이 지났을 때였어.
나의 유방은 통증과 함께 단단하게 부풀어 올랐어.
다른 방식으로 너를 품을 수 있구나 생각했어.
배안이 아닌 너의 형체, 그대로 내 품에 앉는 거야.
나는 보송보송한 얼굴이 되어 돌아온 너의 달큼한 냄새를 맡았어.
너는 나에게 가장 처음의 존재야.
네가 내 품에 안겨 작은 입술의 힘으로 내 젖을 빨았을 때,
나는 너에게 아낌없이 부어주기로 했어.
세상의 아름다운 빛, 단단한 신뢰, 식지 않는 사랑… 모두를 알게 될 거야.
너는 나의 시간을 먹고 자라났어.
밤새 피투성이가 된 너의 다리에 약을 바르고, 너의 작은 손에 아기용 양말을 신기고, 부드럽게 너의 등을 어루만지는 잠 못 드는 시간들이 있었지.
아침이면 퀭한 두 눈아래 깊게 내려앉은 다크 서클과 푸석한 얼굴.
하지만 너는 천사처럼 맑은 얼굴로 나에게 싱끗 웃어 보였지.
네가 너의 연약한 피부를 긁어 상처라도 낼까 봐 나는 아무 일도 안 하고 너를 바라봤어.
누구도 시킨 적 없는 자발적 노동의 시간은 끝이 없었지.
나는 가족이 없는 사람처럼 너와 둘 뿐인 시간을 견뎌야 했어.
너와 함께 있었지만, 고독은 형벌이 되어 가혹했어.
나는 창밖 바다를 바라보며 깊고 아득한 느낌을 받았어.
그리고 너와 함께 헤엄치는 꿈을 꾸었어.
언제가 끝인지 알 수 없는 저주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
탄생이 축복이라고 생각된다면 좋을 텐데.
감은 눈으로 조용히 내 품에 안겨있는 너를 여전히 기억해.
부드럽고 앙큼한 너의 입술을 잊을 수 없을 거야.
너는 열이 올랐어. 뜨거운 이마와 파래진 입술, 나는 놀라 너를 품에 안았지.
너는 축 늘어져 숨을 멈춘 것처럼 사지가 뻣뻣해졌어.
너를 안고 달렸어. 가까운 병원으로 가기로 했어.
너를 데려가려고 뛰었는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어.
나의 우울과, 나의 고독이 널 아프게 한 걸까.
너는 하얀 거품을 물고, 의식을 잃었어.
아기 좀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어.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제야 달려왔어.
너의 작은 팔에 주삿바늘이 통과하고 너는 잠잠해졌어.
이내 너는 다시 숨을 쉬었고, 처음 세상을 향했던 울음소리를 내었어.
나는 풀썩 주저앉았어.
다시는 나쁜 생각은 하지 말자고 되뇌었지.
어제, 너는 또래 친구들과 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갔어.
맑았던 하늘이 해를 집어삼켰을 때, 흐린 하늘은 억수같이 비를 쏟아냈어.
그날 깊은 밤이 되어서야 너는 집으로 돌아왔어.
너는 가방도 벗지 않은 채 습관처럼 나에게 왔어.
까만 사각 뿔테의 안경을 쓴 뽀얀 얼굴을 하고 말이야.
엄마, 잘 자요,라고 말했지.
오늘 비가 많이 왔는데 옷은 안 젖었니, 우산을 잘 가져갔어하고 말했어.
너는 미소를 지으며 네, 네 다 괜찮아요. 엄마 얼른 자요 하고 말하며 안방의 불을 꺼주었지.
탁!
사물들은 어둠에 묻혔고, 나는 까마득한 과거의 시간을 주마등처럼 훑고 있었어.
얼마나 많은 일들 우리 사이에 있었는지 더듬어보았지.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거야. 지금으로.
세상에 너처럼 다정한 아들이 있을까 생각했어.
나의 몸처럼 너를 생각했던 나날들과 이제 천천히 작별해야겠지.
너는 이제 나와 다른 말투를 쓰게 된 것처럼 나와 다른 생각을 할 거야.
이제 나보다 더 길눈이 밝고, 나보다 더 기계에 익숙한,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
그러다 나는 너의 주변을 생각했어.
경계해야 할 친구들이 있었고, 몰랐으면 하는 것들이 보였어.
세상의 감춰진 어둠, 서늘한 불신, 이유 없는 증오… 모두를 알게 될 거야.
너는 아직 나를 필요로 할 거야. 그렇지?
언제까지 네 곁을 지키고, 언제쯤 물러나야 할까.
뫼비우스의 띠처럼 상승과 하강을 그리고 교차점을 지나 다시 상승…
나는 기꺼이, 그 연속적 굴레에 승차할 거야.
어느 날, 너는 내게 말할지도 몰라.
내가 들어 슬플 말들을.
그럼, 난 다른 모습을 하고 너의 곁에 있을 거야. 네가 원하는 방식을 하고서.
내일의 너는 또 다른 모습을 할 테지만, 나는 언제나 너를 처음 안았던 그 순간을 품고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