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메이트, 없는 자리를 채워주는 사람
어느 날 남편은 내게 말했다.
"나는 당신과 적당한 거리가 필요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안방의 커다란 침대에 누워있었다. 어젯밤 내린 비로 습기를 머금은 이불이 몸을 더 무겁게 짓눌렀다.
언제부터 이렇게 외로움을 품고 결혼 생활을 이어온 걸까.
사랑하지 않았다면 조금은 덜 아팠을까. 남편과 나 사이엔, 벽이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읽었던 책, 아모스 오즈의《나의 미카엘》 속 한나와 미카엘 사이 같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그 이야기는 부부사이의 권태로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요즘의 나는 오히려 그들이 조금 부럽기까지 하다. 그들 사이의 벽은 투명한 유리막으로 되어있었지만 나는 방문을 닫으면 남편을 볼 수 없다.
며칠 전의 일이었다. 나는 일을 마치고 남편 옆에 앉아 그에게 오늘 하루에 대한 짧은 브리핑 같은 것을 했는데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우리 사이 자주 있는 일이라 크게 의미를 두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날따라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남편의 귀를 막은 에메랄드빛 이어폰을 봤다. 나를 보지 않고 고개 숙여 휴대폰을 응시하는 까만 눈도 봤다. 함께 있지만 혼자이고 싶어 하는 그의 의중을 읽어낸 것 같았다.
그의 자리 곁엔 하나둘, 그를 나로부터 막아주는 물건들이 늘어났다. 두꺼운 안대, 바디필로우, 노이즈캔슬링 이어폰...
순간, 나는 올라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의 팔을 툭 쳤다.
“왜 이래?”
“아까부터 내가 자기한테 말하고 있었잖아.”
돌아오는 건 그의 무심한 시선과 차디찬 한숨이었다.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와요.’라고 하지 않으면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으레 그랬듯 침대에 누워, 하얀 이불을 뒤집어쓴다. 그를 기다리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그는 모른다. 오지 않으니까, 내가 울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가끔, 깊고 깊은 우물 속에 빠진 소녀가 된다. 누군가가 나를 구해줄 것이라는 헛된 믿음을 품고, 조용히 책을 읽는다.
오늘은 어떤 문장이 나를 덜 울게 해 줄까. 날 위로해 줄 이야기를 찾아 헤맨다.
《달과 6펜스》를 펼쳤다. 냉혹하게 부인을 떠나 예술의 꿈을 펼치는 스트릭랜드.
《그리스인 조르바》 본능을 좇아 어떤 여자와도 쉽게 연결되는 자연인의 조르바.
그들에 비하면 어떤가...
아침이었다. 나는 커튼을 걷었다. 주말에 맑은 날씨라니... 엉클어진 이불을 정리했다. 생각보다 무겁지 않은 솜덩어리였다. 달달한 무언가를 마시고 싶었다.
"자기야, 우리 카페 갈까?"
"그래."
"그래?"
"응"
남편의 무미건조한 표정, 단답형의 대답, 어딘가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전날 밤, 내가 안방에서 혼자 무슨 시간을 보냈는지도 그는 묻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 일이 없던 것이 되었다. 실제로 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내가 수렁에서 기다린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였는데, 나 혼자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는 것조차 그는 알지 못했다.
내게 한 번쯤 물어봐 주었다면, 따스한 표정을 하고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면......
나의 마음이 흘러 그에게 닿길 바랐다.
외출하기 위해 씻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 멀지 않은 곳에서 그가 나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게 비쳤다.
거울 속에 비친 나와 그를 동시에 볼 수 있었다. 나는 우리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함께 있는 시간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더 간절한 사람,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이 간절한 사람이 다른 표정을 하고 거울 속에 있었다.
이웃 친구는 그만 체념하는 편이 좋다고 했다. 남편들 중 안 그러는 사람 어딨냐 하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하는 그녀의 눈에서 이미 통곡의 강을 건너온 흔적이 보였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함께 있는 걸까.
변화를 두려워해서일까. 일종의 습관 같은 걸까.
우리 관계에 특별한 의미가 깃들여있길 바란다.
바로, 사랑말이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나무는 어느새 봄빛의 연두에서 쨍한 초록을 내보였다. 산책길을 걸으며 먼 산과 가까운 조경들의 풍경이 새롭게 느껴졌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은 나의 살결을 타고 온기를 전해주었다.
우리 부부의 계절은 어디쯤인 걸까.
나의 사랑은 여름을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뜨겁고, 태양 같은 사랑.
어쩌면 사랑의 형태가 다른 게 아니라 사람의 성향 차이인 걸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그를 숨 막히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아파트 단지 내 산책로를 30분쯤 걸으니 이마가 촉촉해졌다. 시간은 이내 정오에 가까워져 있었다. 햇볕이 제법 뜨거웠다.
이상적인 부부관계,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나의 과대망상이 그를 지치게 하는 걸까.
솔 메이트, 서로의 결핍을 채워 주는 사람, 서로의 영혼을 이해하는 사람.
배우자, 동반자.
결혼한 지 15년 가까이 되었다. 우리 부부는 소소한 갈등에서부터 커다란 사건들을 함께 헤쳐왔다.
나는 남편이 나에게 연인이자 가족이란 생각을 했다.
그에게 나의 추한 모습, 나의 약한 모습을 모두 보여주어도,
그는 항상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수 있었어하고 말해주었다.
그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참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발걸음은 조금은 가벼워져있었다.
오늘도 나는 길들여져 버린 여우처럼, 그가 퇴근하는 시간을 확인하고 그와 함께할 밤을 기대했다. 요즘의 냉랭한 우리 사이를 풀어보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지친 얼굴을 하고 메마른 사막바람을 몰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의 어깨에 내려앉은 치열하게 견뎌온 하루의 무게를 엿보았다. 나는 안절부절못했고, 질문 공세를 했다. 그가 언제나 완전하길 바랐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운전 오래 했겠네, 허리는 안 아파? 다리는 안 저려?”
“얼굴이 빨개졌네, 피곤해?”
남편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니 걱정 말라고 했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삼켜야 했다. 그는 이미 내 옆을 스쳐갔고 누구도 옆에 오길 바라지 않는 듯 화장실로 들어가 한참이고 나오지 않았다.
남편이 원하는 우리 관계는 어떤 모습인 걸까.
그는 어느 날 내게 말했다.
나는 우리 사이 적당한 거리가 있었으면 해.
그의 짧은 선언이 나의 마음을 깊게 할퀴었다.
그는 나를 대할 때, 마치 정해진 답이 있는 문제처럼 멀찍이 떨어져 풀어보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를 시처럼 읽고, 느끼고 싶다.
나에게 사랑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로의 살을 부대끼며 서로의 온도를 느끼는 것인데.
당신이 원하는 ‘적당한 거리’라는 건, 나를 너무 외롭게 한다.
나는 어느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