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울음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무너진 건, 나였다
지난 일주일은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정신이 빠져 있었다.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하며, 과거의 일은 이제 진실에서 비껴 나 있음을 알게 되었고, 미래는 애써 접어두기로 하지 않았던 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의 일들이 자꾸 나를 끝없이 몰아세웠다.
불안감을 항상 품고 있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도 쉬이 무너질 수 있는 거겠지.
나는 문득 서랍장을 열었다. 엉망으로 엉켜버린 쿠폰, 옷핀, 실핀, 노란 고무줄을 보고 다시 닫아버렸다. 서랍장을 열기 전에는 담겨있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중요한 서류들을- 병원 실비 청구 영수증, 진료확인서, 아이들의 학교 유인물- 한꺼번에 넣어 둬야겠다 하고 생각했다. 서랍장에 이미 담겨있는 물건을 정리하는 것 말고도 여기저기 흩어진 서류들을 찾아 둬야 한다고 생각하니 지금의 나에게 버거운 일이란 생각을 했다. 언제부턴가 삶은 이렇게 어지럽혀져 있었다.
나흘 전, 오후 한 시가 지나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이 되었나 하고 생각했다. 식탁에 앉아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읽고 있었다. 그가 그려놓은 세계에 가만히 앉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들려주는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를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카버는 알코올 중독 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책상에 앉았다. 짐작 건데 소설이지만 자신의 현실과 맞닿아있는 이야기를 적어내렸을 것이다.
나는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주변의 공기가 변화는 것을 느꼈다. 마치 가을바람이 불어 낙엽이 흩어진 거리를 한없이 배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같았다. 시원 섭섭함이 아닌 시원 쓸쓸했다. 나는 그렇게 흠뻑 카버의 세계에 취해있었다.
그러다 현관문이 열리고, 딸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까지 이어지는 복도를 따라 엉엉 우는 소리에 놀라 나는 황급히 아이 앞에 달려갔다.
딸아이를 살피며 “왜 울어?”라고 물었다. 내가 계속 다그치는 동안에도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아이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아이가 쓰고 있는 분홍색 마스크를 벗겨버렸다. 올해 3학년이 되었지만 이제야 빠진 앞니 사이로 아이 울음소리가 더 크게 새어 나왔다.
“맞았어. 남자 애가 뒤에서 발로 걷어찼어.”
“그게 무슨 말이야?”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나는 학교에 연락하고, 수차례 선생님과 상담하고… … 관련된 다른 아이들의 엄마들과 통화를 하고 다시 상담을 했다.
그 와중에 우리 집 큰애에게도 일이 있었다. 친구와 돈에 대한 문제였는데 나에게 말하지 않고 자기가 갚으려고 했다가 일이 조금 꼬인 것이다. 다음 날 아들은 또 다른 문제로 외부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들을 키우며 이런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갑자기 몰아쳤다. 정말 평온한 삶과 작별이다.
가만히 돌아보면, 지난 일주일만의 일이 아니었다. 월초 여행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숙소에 머물며 고생을 하고 돌아오자 남편이 며칠간 출장을 갔다. 그사이 딸아이는 장염으로 쓰러질 뻔하여 밤잠을 설쳐가며 간호를 했다. 남편이 돌아온 후에는 아이의 육아 방식 문제로 크게 다투었고, 이틀 간격으로 아들이 열 감기에 걸렸다. 보름 넘도록 나는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콧잔등 같은 얇은 피부에 긁혀버린 상처는 작아도 붉고 크게 부어오르기 쉽다. 그처럼 나에게 일어난 일이 어쩌면 불편한 감정이 드는 사소한 일일지라도 지쳐 약해진 나는 그대로 무너졌다.
나는 통제를 잃어버린 채 아들을 훈육했다. 남자아이는 이렇게 따끔하게 혼을 내야 하는 거라고 정당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누가 아이를 때려도 된다고 했는가.
침대에 누웠다. 손이 저릿했다. 잠이 쉽게 들지 못했고, 아들 방에 갔다. 아이는 울어 조금 부은 얼굴을 하고 곤히 자고 있었다. 나는 지난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내가 아들에게 한 건 훈육이 아니라 폭력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저질렀다.
겨우 잠이 들었다. 속에서 올라오는 신물을 느끼며 깨었는데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이 너무 뻑뻑하고 따가워서. 시린 눈에 인공눈물을 넣고 잠깐 눈을 감았다. 깜깜했다.
카버의 소설 속 문장이 생각났다. 주인공이 말했던가. 눈을 감자, 나는 방안에 있었지만 어디에도 속해 있는 기분이 아닌 듯했다고, 정확한 문장은 정말이지 기억나지 않았다.
화장대 앞에 선 나는 수척해진 얼굴과 이마라인에 흰머리가 손톱만큼 자라나 있는 것을 보았다. 물기하나 없이 마른 두 눈에는 실핏줄이 붉게 번져 있었다. 나는 빗질로 앞머리를 조금 내려 자라난 흰머리를 감춰보았다.
핸드폰을 켜보니 시간은 이제 겨우 새벽 4시. 속이 쓰렸다. 나는 안방 문을 열고 나가 정수기 옆에서 위장약을 먹었다.
거실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빈백에 기대 누워있는 남편이 보였다. 그의 앞머리는 선풍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흔들거렸다. 그는 안경을 쓴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숨소리가 일정하게 들렸다. 나는 그가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옆에 놓인 하얀 갓 아래 전등 끈을 당겨 불을 끄자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괜찮아? ”
그는 눈을 뜨지도 않은 채 나에게 물었다.
“응, 자.” 나는 말했다.
그에게 다가가 안경을 벗겨줄까 생각했지만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어떠한 사유도 어떠한 결론도 없는 현실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