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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걷기, 길 위에서

길 걷기, 길 위에서


늘어진 진갈색의 외투로 자신을 가린 한 사내가 길을 걷고 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걸어가는 듯이 느리게, 하지만 개미의 움직임만큼이나 쉬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 발을 딛고 있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이나 오랫동안을 그렇게 걷고 또 걸으며 생각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때에 알 수 없었던 것은 지금도 알 수 없을 뿐이다. 무엇을 알려고 한 것인지조차 더듬어지지 않을 때면, 그 상태가 언제나 그렇게 이어져 오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며 머릿속이 비어버린 것 같이 느껴질 뿐이다.


“대체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아무리 뒤적여 봐도 어디선가 불어온 망망한 바람만이 그의 곁을 지나갈 뿐이다.

“대체 무엇이지, 이 허전함이란 건.”


그로서는 그것이 원래부터 비어있었기 때문인 겐지, 너무 커져버린 욕심 때문인 겐지, 알지도 못하고 알 길도 없다. 알 수 없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그대로 두어야만 한다는, 단순하고 간결한 상황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사내는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사내는 생각한다.

"비에 씻기고 바람에 날려가 버린 것을 더듬으려는 것은 어리석지만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일 뿐이야."

사내는 알고 있다.

“잊힌 것은 지워지도록 내버려 두어야만 하지."


머릿속에 인 깔끄러움에 잠들어 있던 기억 몇 점을 흔들어 깨운다. 손가락 끝에 걸려 나온 꼬리표에서 ‘이성’이라 적혀 있는 꾸깃꾸깃 일그러진 형상 하나를 발견한다.

사내를 가린 것이 외투가 아니라 어쩌면 가면일 수 있다고 사내는, 혼자의 생각을 지어낸다. 어떤 물리적 작용이 가해졌던 겐지 언젠가부터 그것은 사내의 얼굴을 덮고 있게 되었다고, 사내의 생각이 사내에게 얘기한다.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에서는 작은 실룩거림조차 읽을 수 없다. 표정을 볼 수 없으니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대체 왜 그러는 것인지, 낌새라고는 아무것도 알아차릴 길이 없다. 그러니 그 누구도 그의 감정이나 생각 같은 것을 헤아리려는 노력 따윈 하지 않는다.


사내는 어느 날의 그날부터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혼자라는 건 편안하게 외로운 상태일 뿐이지.”


오래전인지, 얼마 전인지, 기억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는 이곳을 떠나갔다. “아주 멀리로 갈 거야.”라는 그의 말을 들은 것 같아서 멀리서나마 그를 배웅하려 했던 것 같지만 이것 또한 기억 분명하진 않다.

그의 뒷모습을 더듬어보려고 애를 쓰다 보면 기억의 허공에 빠지게 된다.

“빈 것 같은 느낌은 빈 것의 울림이야.”


그를 찾아낼 수 없는 날이면, 비록 비었다는 것이 불안정함을 동반한 공허한 상태이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편안한 상태이기도 하다는 것을, 무엇인가에 화들짝 놀라 깨어난 검은 밤의 잠처럼 되새기게 된다.


채우지 못한 비어있는 가슴의 불안정성 때문에, 분명 그 덕분에,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나마 이렇게 글줄을 긁적이고 있으니, 그 참 세상의 일이란 건 사나운 모래바람 가운데서 초록의 오아시스를 만나게 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생겨날 수 있는 것처럼, 바로 한 걸음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이의 형상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의 이유 없는 길 걷기 같은 것인가 보다.


by Dr. Franz KO@New York (고일석, Professor, Dongguk University(fo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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