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란 무엇일까.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운명이란 게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만약 운명이라는 것이 인간의 어딘가에, 그것이 신체이건 아니면 정신이건 또는 삶이건, 들어붙어 지내는 것이라면, 그 운명은 인간이라는 숙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일까.
만약 누구에 의해, 어떤 사유로, 어떤 방법과 방향으로 운명이 결정되는 것인지에 대해 미약하게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된다면 혹시 나의 운명에게 말 한마디라도 넌지시 건네볼 수 있지나 않을까.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여기고 있진 않지만, 이것은 생각하는 자로써 살아온 지난 삶의 시간 동안, 끊이질 않고 질기게 이어져 온 원초적인 질문이다.
삶이라는 저잣거리를 여기저기 기웃기웃 돌아다니다 보면 간혹 그 파편인 듯 모서리 날카로운 부스러기들이 햇살에 난반사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보면 반짝이는 것이라고 해서 그 모든 것이 챙겨둘 만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생각하는 능력이 뛰어난 이가 운명이 무엇인지, 이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 좀 더 그럴싸한 해석을 붙였다. 흔히 칼 융이라고 하는 두 글자로 불리고 있는 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의 해석이 그것이다. 그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름의 해석을 붙였다.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인간 삶이 나아가는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데, 이것을 두고 운명이라고 부른다."
그의 이 해석을 곰곰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첫 번째는, 나의 운명은 무의식에 의해 결정지어질 거라는 끔찍하고도 잔인한, 약간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는 되지만, 그러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결론 앞에 서게 된다.
두 번째는, 내가 하기에 따라서는, 무의식을 어떻게든지 의식화할 수 있다면, 나 스스로가 나의 운명에 간섭할 수 있게 된다는, 더욱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들긴 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이상적인 결론을 마주하게 된다.
인간이 자신의 뇌에서 사용할 수 있는 부분은 적게는 2퍼센트에서 많게는 5퍼센트 정도라고 연구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것의 정도는 피실험 대상이었던 인간의 교육 수준, 생활환경, 경제적 능력, 사회적 배경 등에 따라 높거나 낮게 표출되었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는 아무 낮은 수치인 것만은 분명하다.
뇌라는 게 분명 인간의 몸속에 들어있고 인간이 사용하라고 주어진 기관인데도 많아봐야 겨우 5퍼센트밖에 사용할 수 없다니, 이러한 연구결과들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나머지 95%의 영역에는, 무엇인가 은밀한 것들이 똬리를 틀고 있을 것 같이 느껴진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많아야 5%의 영역 중에서도 그나마 일부분은 무의식이 사용하고 있을 테니 실상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부분은 생각보다 더 작아지게 된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우리가 사용하지 못하는 뇌의 부분이 무의식을 관장한다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는 주장이나 그렇지 않다고 하는 주장 양쪽 모두 아직까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아 보인다.
사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 하더라도, 원래부터 있어 왔지만 아직 찾아내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것과 그것에 대한 인간적 관점에서의 해석일 뿐이다.
인간은 그런 활동을 통해 쌓은 지식에 대해 “그것은 이것이다.”라거나 “그것은 이러한 것이다.”는 식의 '정의'를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형이상학적인 영역에 대한 것이라면 오직 초자연적인 존재만이 그것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이 경우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곤 그것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제대로 헤아려보는 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을 수학적으로 보자면 증명을 통해 정리를 찾아낼 수도 있겠지만, 운명에 대한 것이라면 인간으로 태어난 누군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리'라고 할 수 있는 정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어쨌든 무의식과 의식, 운명에 대한 칼 융의 표현을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나의 운명에게 설핏하게라도 눈인사 건 낼 방법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무의식을 의식화하도록 노력하라. 그것은 당신의 무의식이 당신의 인생이 나아가는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에 의해 걸어가게 된 인생의 길을 언젠가 당신은 ‘그것이 나의 운명’이었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무의식의 의식화(The Conscientization of Unconsciousness)’를 통해 무의식의 영역에서 행해지고 있던 행위나 사고를 의식의 공간으로 끌고 나오게 된다면, 비록 '누가', '왜'라는 근본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낼 순 없다고 하더라도 일상의 삶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 조금 더 제대로 된 눈을 갖게 될 것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운명에게도 미약하나마 변화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무의식의 영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들이란 게 대체 어떤 것들일까. 의식 없이 행해지고 있는 인간의 행위란 게 무엇일까. 혹시 의식은 하되 그 정도가 경미한 의식이나, 의식의 영역에서 밀려난 비의식 또는 의식의 영역을 넘어선 초의식을 무의식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의식을 의식화하자는 짧은 구문에서조차 한 걸음 제대로 나아가기 어려우니, 오늘도 ‘생각하기’의 걸음은 길을 잃는다. 어쩌면, 그래서 인간은, 생각하고 생각해야만 하는 존재인 것 같다.
by Dr. Franz KO@New Y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