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세례자 성 요한>, c.1507–1516
<Saint John the Baptist>, Leonardo Da Vinci, Louvre, Paris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세례자 성 요한>은 그가 남긴 작품들 중에서 가장 신비로운 작품이다.
얼굴의 윤곽이며 표정, 몸매와 몸짓, 왼팔에 걸친 옷의 실루엣을 감상하면서 세례자 성 요한을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검은 배경의 터치와 성 요한의 오른쪽 어깨와 팔의 윗부분, 얼굴에 쏟아지는 조명은 카라바조의 키아로스쿠로(음영법)를 연상시키고 있어 바로크미술의 선구자가 카라바조가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갖게 한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에 걸려 있는 <세례자 성 요한>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누구보다 탁월한 호모사피엔스적인 예술가였기에 탄생시킨 수작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학명의 의미처럼 ‘생각하는 것’ 또는 ‘슬기로운 것’만으로 우리를 호모사피엔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호모사피엔스이자 그 아종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가 되는 길의 첫걸음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 생각한다’는 것을 단지 ‘한 번 더’라는 횟수적인 의미로 해석하였다면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성’이라는 단어에는 ‘절대자를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호모사피엔스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이성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종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종합해 보면 호모사피엔스는 ‘인간의 본질뿐만이 아니라 사물 또는 현상에 대해 탐구하고 인식할 수 있는 직관적인 능력’을 가진 유일한 종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호모사피엔스와 글쟁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글쟁이는 다른 보편적인 사람들보다 더 예민한 직관적 사고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 능력을 유희할 줄 아는 호모사피엔스를 일컫는 말이다."
‘직관의 유희’는 중세시대의 수사학과 같이 글쟁이가 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과목이다.
(수사학(修辭學)은 문학과 사상에 있어서 감정이나 느낌 따위를 효과적이면서 미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문장과 언어의 사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는 것에서 '또'라는 개념이 관찰적 의미에 통찰적 의미에서의 정당성을 부여받게 될 때, 그 또는 그녀는 비로소 호모사피엔스적인 글쟁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
호모사피엔스적인 글쟁이는, 자연을 노래할 때면 자연관찰자가 되고, 인간을 노래할 때면 인간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사랑을 노래할 때면 지독한 사랑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수 있다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으며, 신을 노래할 때면 ‘존재하고 계시며 인간 믿음 가운데 서 계신 신’을 티끌만 한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호모사피엔스적인 글쟁이이다.
호모사피엔스적인 글쟁이가 세상의 진리를 탐구할 때면 선현이 남긴 글과 철학에 발끝부터 머리끝까지를 아무런 주저 없이 담글 수 있어야만 생물학적 수준에서의 호모사피엔스를 넘어 글쟁이로서의 호모사피엔스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글쟁이의 글쓰기는 ‘지식의 유희 안에서 자유로워지게 되는 현실적인 행위’이다.
이를 위해 글쟁이는 지식의 습득에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깊지 않은 지식의 우물에서 글을 길어 올리다 보면 자꾸만 단순한 수사학에 기대게 되어 결국에는 개울물에 떠내려가는 종이배처럼 잔물결에도 쉽게 흔들리기 마련이다.
이에 비해 호모사피엔스이자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인 글쟁이는, 지식을 습득하고 그 지식 안에서 이룬 유희를 수사학적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본질적 존재를 탐구하는 글쟁이 본연의 길을 누구보다 더 멀리까지 걸어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과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지독하고 치열하게 고민해 보지 않은 보편적인 수준의 글쟁이는, 비록 일평생을 바치더라도, ‘인간의 정신과 영혼에 도끼’가 되는 호모사피엔스적인 텍스트를 뽑아내지 못할 것이다.
사실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자신의 존재에게 접근한다면, 그 답은 모호하기 일쑤이다.
그렇기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철학적 명제를 바탕으로 "나는 글을 쓴다. 고로 존재한다."를 글쓰기의 핵심명제(key thesis)로 삼는 것이,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보다 현실적인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씀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찾는다는 것이 어쩌면 욕심 찬 변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끝이란 것의 개념조차 잊어버리게 만드는 모래바람 몰아치는 사막에 난 소로이기에 ‘이 길이 곧 글쟁이가 가야 할 길’인 것이다.
산다는 것은, 사실 여부가 중요하지 않는 것들이 지천으로 늘려 있는 저잣거리를 양팔을 휘저으며 돌아다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란 것을, 살아보는 알겠다.
사막을 걷다 보면 지나 온 발자국은 이내 지워지기 마련이란 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길 걷기는 어쩌면 끝이란 곳에 도달할 수 없음을 그냥 받아들여야만 한다.
생각에 생각이 이어지며 생각이 길어졌나 보다.
괜찮다, 호모사피엔스는 원래 그런 것이다.
거리의 분주함이 아침 햇살처럼 창을 넘어 들어선다.
이럴 때면 ‘벌써’라기보다는 ‘어느새’라는 텍스트가 적절할 것 같다.
위대한 호모사피엔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에 아무래도 상관없다.
객실의 문을 나서기 전부터 데카르트와 카프카의 곁에서 유영하던 생각이 좁은 물길을 거슬러 기어이 상류로 오르고 있다.
오르고 또 오르다 보면 언젠가는 발원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고, 피렌체의 그곳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나게 될 것이다.
허락된 것을 지나 너무 멀리까지 와 버린 것일까.
지금은 피렌체의 아침으로 돌아갈 때이다.
오늘의 길은 오늘 가야만 한다.
피렌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호모사피엔스를 잉태하고 키워낸 위대한 지성의 공간이기에 나를 반길 이유 따위는 없겠지만 한 범부의 약속하지 않은 방문을 굳이 꺼려하지도 않는다.
“글을 쓰는 호모사피엔스이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만큼이나 나도 자유롭다.”
- 뉴욕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by Dr. Franz KO(고일석, Professor, Dongguk University(fo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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