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by 김인영


의자


날이 밝기를 기다려 남편과 아침운동을 나갔다. 추운 겨울을 예고하던 여름 기상 캐스터의 말이 옳았다고 생각하며 내복을 입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집 근처 여고 교장 선생님은 오늘도 교문 앞에서 학생들을 맞이하신다. 난 가벼운 목례를 한 후 학교 앞을 지나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건강검진 때 생각지 못하던 혈압과 당뇨가 경계라고 하신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목의 가시처럼 걸려 아침 운동을 시작했다. 무릎과 허리가 불편함에도 정작 해야 할 운동을 자주 하지 못한 것이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몸이 아파서 운동이 게을러진 것인지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다시 시작한 운동은 아침 시간을 바쁘게 했다. 공원 입구에 양쪽으로 자리한 신호등에서 어느 쪽 불이 먼저 초록으로 바뀌는지 우린 늘 내기 아닌 내기를 한다. 조금 더 일찍 공원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에 이른 시간부터 조급함을 보이곤 한다. 신호등은 비웃듯이 나의 예측을 빗나가게 한다. 내가 맞는 날이면 기분은 한껏 고조되어 아침 댓바람에 파안대소를 한다. 출근을 서두르는 차량들을 뒤로하고 숲이 보이는 공원의 계단을 오를 때면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계단을 오르기 전의 세상엔 번잡하고 많은 인연으로 맺어진 거미줄 같은 만남이 있다. 하지만 일단 공원으로 들어오면 하늘은 더 넓고 푸르다. 그곳에선 어둡고 긴 밤사이 자리를 지킨 나무들이 기지개를 켜며 반갑게 맞이한다. 숨이 턱에 닿도록 경사진 언덕 오를 때면 손짓하며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는데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햇살이 지구를 데울 때쯤이면 개들이 주인과 함께 나와서 자유롭게 뛰는 모습을 보는 것은 눈을 즐겁게 한다. 막 걷기 시작한 어린아이들이 다가가 만지려 하면 먼저 달아나는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개들이 내게 다가오면 먼저 내가 피하기 때문이다. 개들이 하루를 운동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은지 마감을 운동으로 하는 것이 좋은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을 책임지고( 요즘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인식되지만 ) 있는 주인이 시간이 나는 때에 개의 자유함은 시작된다. 그들의 운명은 주인에게 달린 까닭이다. 잠시 내 인생의 주인을 생각한다. 내 주인에게 나는 순하고 여리지 않다. 그래서 죄송하다. 늘 그러하듯 오늘도 나는 멀리 보이던 의자에 다가가 앉는다. 그곳에서 잠시 쉼을 고른다. 간밤에 내린 이슬에 젖은 곳을 닦아가며 자리를 마련하곤 하늘도 보고 내가 걸어온 숲과 잔디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의 모습도 본다. 때로 새떼가 날아와 비상하는 모습을 보는 횡재를 한다, 30분 후에는 나 역시 서두르는 삶의 대열로 돌아가지만 의자에 앉아있는 시간만큼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 내가 나를 마주하며 만나는 시간인 것이다. 호흡이 느려지니 생각도 잠시 느려지는 듯싶다


의자 때문이다. 내게 자신을 비워 앉도록 해 준 의자가 고맙다. 의자는 발이 네 개여서 걷지 못하고 앉아만 있다고 관찰력이 있는 사람은 말하기도 했다. 이른 시간 숲에서 만나는 의자는 집에서 앉는 의자나 버스에서 혹은 영화관에서 식당에서 만나는 의자와는 느낌이 다르다. 때로 슬퍼지기도 하는 느낌을 받기도 하니 이상하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그냥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내가 머무르던 자리에 누군가가 앉을 것을 안다. 누굴까? 평소엔 하지 않던 생각을 해본다. 얼마나 오래 머물까? 그이는?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할까? 몇 사람이나 거쳐 갈까?

아는 분이 말했다. 서대문 충장로 길을 5분만 걸으면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고 그러나 스쳐가는 그 얼굴들을 다시 만나게 될 확률은 아주 희박하다고 그래서 때로 10,000원씩을 나누어 주고 싶다고, 그리고 잘 살라고 축복해 주고 싶다고 다시 볼 확률이 희박할 사람에게 돈을 내어준다는 독특한 발상이 이해는 간다. 타인에 대한 사랑과 연민 그리고 생명의 소중함과 다시는 없을 인연으로 인한 만남의 아쉬움 그런 것 아니었을까?

한 친구가 몇 달 있으면 다른 도시로 거처를 옮긴다. 그는 말했다. 어느 날 산 위에 올라가 도시를 내려다보다 문득 그곳에서 생을 마감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나도 그 산에 올라가 도시를 내려다본 적이 있으나 내게 그곳은 뜨거운 햇살과 목마름으로 내려오고픈 산일 뿐이었다. 내가 앉아 고마움을 느끼고 사랑하고픈 이 의자 또한 타인에게도 같은 느낌을 주지는 앉으리라. 내가 만난 어제 그 많은 사람에게 나는 돈을 주지 않듯. 그이가 머물고 싶은 그곳이 내게 그다지 흥미가 없었듯이 그 많은 의자들도 그냥 의자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냥 스쳐질 것이고, 그이 에게만 그 도시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고 의자의 몫은 그냥 그 자리에 있으면 되는 것이다.


아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다시 못 볼지도 모르니 우리 서로 눈인사라도 하자며 웃음을 먼저 보내야 한다. 그이가 사는 도시엔 내가 모르는 비밀과 향기가 있으니 나도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리라. 내가 앉았던 그 자리에서 당신도 앉을 기회가 된다면 분명 오늘의 하늘이 더욱 파랗고 스치는 바람은 가슴에 담고 싶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나의 마음을 너의 향기로 물들일 때 그것이 우리의 새로운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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