덫에 걸리다

by 김인영


8월의 마지막을 향해 달리는 오늘. 새벽 단잠을 깨우며 울어대 때로 귀찮던 창밖의 쓰르라미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은근히 기다려진다. 그도 떠나니 계절이 바뀌는 시점이구나 생각한다. 잠든 사이 도착한 글을 펼쳐보니 나이 들어하는 기도가 나를 반긴다. 머리를 감을 때 마지막까지 내 손으로 감게 해 주시라고. 발톱을 자를 때는 마지막까지 내 손으로 자를 수 있게 해 주시라고 사랑하는 이들을 떠오르면 마지막까지 이 기억력을 가지고 살게 해 주시라고 구하고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간절한 마음의 글이다. 건강 하나만으로 그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않는 감사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마음을 담은 소박하고 진정이 담긴 글. 왠지 가슴이 서늘해지며 공감이 간다. 그이는 가난한 마음이라고 했다.


한 때 가난한 마음의 실체가 궁금했고 어떻게 그 마음을 내 안으로 들이나 고심하기도 했다. 그것은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가을 나이에 이르러 돌아보는 지금에야 조금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 드는 가난한 마음을 시인은 건강으로 마감했다. 인생의 오르막길을 오르고 녹음이 사라진 길에서 바라보는 자의 눈에는 숨 가쁘게 올라올 때는 지나치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스물 거리며 다가온다. 그때는 왜 안 보였을까 그때는 왜 잡지 못했을까 왜 말하지 못했을까. 원했던 것은 과욕이었고 나의 눈은 외눈박이 었다. 놓치고 떠난 것에 망설임과 연민 따윈 없애야 한다고 다짐하며 산 것은 어리석음이었다.


두어 달 전 길을 걷다 주저앉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자신의 푸른 신호등을 건널 때 나는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날 집을 나설 땐 평소처럼 맑은 하늘이었는데 돌아가는 오후는 머리는 물론 불안에 싸인 가슴은 답답할 뿐이었다. 그날 이후 몇 차례 병원을 다니며 검사를 마치고 혈전 색전증이라는 낯설고 기이한 병명을 진단받았다. 옴 몸에 땀이 나고 눈앞의 거리를 평소처럼 걸을 수 없는 다리의 뭉침은 내 몸을 떠다니던 혈전이 다리에 뭉쳐서 일어난 결과임을 알았다. 60 평생 혈액내과라는 것의 존재도 모르던 나인데 그곳에 계신 의사 선생님이 위대해 보이고 그의 눈을 마주하고 앉아서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을 긴장하며 기다리는 당혹감과 실망스러운 날들로 지루한 여름을 코로나와 함께 보냈다. 가족 친지 그리고 친구들은 그나마 다행이라며 내게 위로를 건네지만 수긍하는 마음과는 달리 앞으로 어쩌나 하는 근심이 나를 눌렀다.


유독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이다. 걸으며 보고 노래와 연주도 듣고 생각을 정리하고 걸으며 시를 외우고 작가의 책을 소리로 듣고 그리고 내 사랑하는 딸들과 통화도 한다. 그렇게 그들에게 엄마가 씩씩하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며 함께 안심을 하곤 한다. 무엇보다 남편과 손잡고 산책하는 것이 나의 일상의 행복인데 나는 30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내가 70 걸음을 걷던 날 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은 내가 70보를 걸었노라고. 건너 건너 소식을 전해 들은 존경하는 은사님이 전화를 통해 놀람과 위로를 건네시며 내게 말한다. 여사님이 세월의 덫에 걸리셨노라고. 아 그랬구나 내가 걸어온 길이 이만큼의 고통과 인내를 수용해야 할 나이구나 그날 바로 깨달았다. 이제부터 내게 오는 육체의 질병은 살다가 걸리는 덫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인간이 짐승을 잡겠다고 놓아두는 덫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엔 참 많은 덫이 있지 않은가. 죄악의 덫 이기심의 덫 탐욕의 덫 중상모략과 이기심과 질투 등 얼마나 많은 덫이 우리의 삶을 위협하며 잠재해 있는가 말이다. 살아가며 피할 수 없는 생 노 병 사의 운명 속에서 그저 또 하나의 다른 얼굴의 숙제를 만난 것이다. 숙제는 열심히 준비하여 과제물을 제출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열심과 노력으로 내가 걸린 덫을 빠져나가리라 생각했다. 의사 선생님의 처방을 잘 따를 것이며 더욱 열심히 운동하고 유독 내게 관대하여 즐기며 찾아가는 음식 순례를 조금 자제할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내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는 분들 또한 나의 스승으로 모시는 겸허한 자세로 나갈 것이다. 산책길에 너무 느리게 가는 분의 마음도 헤아릴 것이며 사색을 방해하는 젊은이들의 하이톤의 목소리도 다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힘들게 언덕길을 오르는 분을 보면 나처럼 덫에 걸린 분일 터이니 그분 또한 지금 상황을 잘 이겨 내시기를 마음으로 응원할 것이다.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나의 힘든 경험을 통하여 육체적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위해 나누지 않았고 함께 손잡고 기도하지 못했음을 반성했다. 나를 위해 같이 아파하고 시간 내어 마음을 모으는 분들이 너무 많음을 보고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또한 생각한다. 그들의 말씀이 옳았다고. 이만큼 이어서 다행이고 뇌가 아니고 심장이 아니고 다리여서 감사하다고. 내일 아침이면 어쩌면 다시 찾아와 내게 노래를 들려줄 아직 못 떠난 쓰르라미 소리를 들으며 산책하고픈 마음이 드는 시간이다. 살아 숨 쉬는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가 꽃자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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