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시간이 많은 세상

by 김인영

사랑할 시간이 많은 세상


먼 곳에 계셔도 늘 제 중심에 자리한 친구여 평안하신지요? 천지가 꽃으로 도배된 봄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라일락 향기가 저를 들뜨게 하는 날입니다. 미세먼지가 사라진 맑은 도시가 가져다준 상쾌한 기분만큼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만 같군요. 낙산에 올라 바라다 보이는 인수봉에 눈인사를 하고 뽐내며 다투어 피어있는 꽃에게 찬사와 감탄을 보내며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아 봅니다.

전에는 조금 거리를 두며 꽃을 바라보곤 했지요. 봄이 오면 그저 무더기로 피어있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지요. 이제는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또 오래 들여다보고 있네요.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물이 때로 다른 모습으로 비칩니다. 내가 변한 탓이지요. 힘들었던 순간조차 그리울 때가 있답니다. 그때는 왜 그리도 서럽고 아팠을까요?

문득 어머니가 서 계셨던 그 자리에 그만큼의 폭과 높이로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이 세상과 작별하실 즈음 어머닌 60이 오면 첫눈 내리는 날 덕수궁에서 만나자 고한 그분을 떠올리셨습니다. 그리곤 푹신한 의자에 눕듯이 앉으시어 지키지 못한 약속을 몇 번이나 되 뇌이셨지요. 아버님도 비슷하셨습니다. 고향 가까이 청천강이 흘렀고 청년시절에 을밀대에 오르시곤 했다는 것을 70을 훨씬 넘기시고야 말씀하시곤 했지요. 나이가 들면 멀리서 바라보고 생각하던 것들이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 오는 가 봅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우린 그것을 추억이라 말하는가 봅니다.

지난날 적당히 층간소음이 있고 아주 가끔이지만 고층에서 쓰레기를 아래로 던지는 가정이 있다는 아파트 방송을 들을 땐 민도가 낮은 곳에 산다고 불평을 하곤 했지요. 지금은 몇 번을 초청을 해도 시간을 내지 못하는 도시의 세련된 젊은 이웃에 손 내미는 것을 포기하고 사는지 일 년이 되어가네요. 옛 이웃들은 먼저 문을 열고 다가와 가까운 나주와 영광 보성 그리고 담양에서 들고 온 푸성귀와 넉넉한 먹거리를 안겨주며 푸른 마음을 나누고 살았지요. 그들이 그리운 저녁입니다. 늘 꿈을 꾸며 살았습니다. 타향에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도 왠지 그리움이 깊었습니다. 많은 날 지는 해에 가슴이 먹먹해지면 베란다에 자리한 꽃에 물을 주며 말했지요. 언젠가는 돌아가리라고. 어느 날 정말 그날이 선물처럼 다가왔습니다. 처음엔 그것이 우연이고 그냥 선물인 줄 알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것은 나의 염원의 탑이 쌓여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게 되었지요.

인생의 길을 많이 걸어왔지요. 앞으로 얼마나 걸어야 할지 누가 알겠어요. 다만 한 가지 알고 있는 것은 길의 끝은 분명히 있으되 그날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경주하듯 달려온 길을 돌아보니 어리석게도 귀한 줄 모르고 허비하고 놓쳐 버린 시간이 많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조심스럽게 여전히 실수하고 반성하는 날들이 많았으면 하는 욕심을 냅니다. 오늘 제 모습은 세월의 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온 연어를 닮았습니다. 신비스러운 생명의 법칙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희망이 있는 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압니다. 비록 특별히 발자국을 남기진 못해도 내가 있어 기뻐하는 이들이 곁에 있어 보람을 느낍니다. 나의 모습을 보고 앞으로 나갈 용기를 얻는 이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처럼 늦은 시간까지 앉아 이야기를 못 나누어도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고 찾아올 내일을 그리며 잠드는 정돈된 모습으로 살면 좋겠습니다.

멀리 있는 딸들과 사위들에게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을 생각하며 힘을 실어주는 날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달 머물 예정인 우리 부부의 제한된 시간을 못내 아쉬워하며 가족여행을 계획하고 뮤지컬 예약을 하는 따스하고 세심하게 배려하는 마음을 생의 끝날까지 갖고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부합니다. 우리의 두 딸들이 멋진 여인과 아내로 살아갈 때 자주 스스로를 돌아보고 작은 태양이 되어 아름다운 가정과 사회를 이루어가는 노력을 멈추지 말라고.

손주들이 먼 훗날 자신을 기억해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고민하는 할머니가 물질이 아닌 삶의 기둥이 될 만한 지침서를 고르고 계신 것이 멋져 보였습니다. 소통하는 삶, 나누고 사랑하는 삶. 수명이 길어진다는 것은 사랑할 시간이 더욱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내가 감동한 시인의 마음을 타인에게도 전해주어 그들도 행복하고 감동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주 늦기 전에 남편과 손을 잡고 산티아고 순례 길과 마추픽추를 다녀오고 싶네요. 더 많이 걷고 더 자주 하늘을 보고 그리고 먼저 다다가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제가 하고 싶은 것입니다. 향기로운 사람. 내게서 쉼을 보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어 욕심을 부려 봅니다. 바로 당신이 그런 분 아니던가요? 제가 정말로 사랑하고 닮고 싶은 분께 오늘도 멀리서 소식을 전합니다. 이제 내일 비가 내리면 천지에 꽃 잔치는 끝나고 아련한 그리움과 기다림의 시간이 또 제 곁을 지키겠지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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