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의 오늘
소풍 돗자리에서나 상견례를 하던 집김밥들은 전문점 등장으로 메뉴경쟁을 거치고 여행과 인터넷의 시대를 겪었다. 세상으로 나간 김밥은 같은 이름으로 전혀 다른 맛을 내는 김밥을 만나 ‘룰이 없는 게 룰이구먼.’ 깨달았을테고, 똑같이 채소랑 고기 넣고 둘둘 말았는데 샌드위치 혹은 부리토로 불리는 음식을 보고,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구나!’ 알아챘을 법 하다.
미국 마트 트레이더 조에서 냉동김밥이 화제였다. 한류 타고 인기몰이를 해서 일 수도, 집 앞 마트에서 이그조틱한 식도락을 즐기는 재미를 찾는 손님들 덕일 수도 있겠다. 이그조틱함을 느끼는 건 그들만이 아니다. 다른 나라 말로 소개되는 김밥을 보는 나도 그렇다.
누군가 스시와 김밥의 차이를 묻는다면 한국인은 고작 ‘스시는 스시고 김밥은 김밥’이라 하겠건만, 김밥이 낯설었을 이들이 세세히 살핀 내용이야말로 새롭고 이국적이다. 보통은 소스를 찍어 먹지 않는 점, 참기름과 소금간, 제약 없는 속재료, 그 다양성만큼 다채로운 색감, 이동하며 먹기 알맞은 점, 친구와 나눠 먹기 좋다는 점들이 꼽힌다. 맞네, 맞네.
만드는 법도 그렇다. 생초보에게 일단 말아보라 해 놓고 옆에 서서 쪼오금, 적당히, 요래요래, 조래조래 하다가 “그러면 터져!” 긴박한 외침이 따르던 몸의 가르침에 비해 외국어로 풀어진 요리법은 생경할 정도다. 밥은 '이만큼' 대신 about baseball size 만큼 쥐어, 김에 펼칠 때는 '요~까지만' 대신 'fill about three quaters to the top' 한 뒤에, '살살살살' 대신 fluffing the rice to even layer 하게 손가락을 쓰고, 김 끝이 풀어지지 않도록 seam side down 해 놓고 잠시 어디 다녀오면 된다는 식이다. 좀 쓸모없다는 어감을 풍기는 꼬리, 꽁다리, 끄트머리 대신 ‘end piece’는 all the ingredients in a big bite 라서 모두에게 best part라고 소개된다.
큰 접시에 띄엄띄엄 한 알 한 알 색감을 드러내며 놓이면 한 줄이 아니라 한 알씩 먹어야 할 음식으로 보인다. 여기다 누가 ‘간단히’를 수식어로 붙이겠나. 스페인의 타파스, 프랑스의 카나페, 이탈리아의 치즈 플래터 못지않게 아름답다. 김밥으로 피라미드를 쌓았던 내 유치원 생일상이 오히려 파격이었달까. 미국의 유명하다는 서브샌드위치 집과 부리또 집을 처음 찾아 잔뜩 긴장 하고 주문을 했는데 막상 음식이 만들어지는 걸 보니 ‘저거 울 엄마가 김밥 싸주던 건데?’ 싶었던 적이 있다. 익숙한 체계에 새 메뉴를 얹어 해외로 뻗어갈 포부인지, 기다란 작업대에서 옆으로 이동하며 손님이 고르는 재료를 차례로 넣어 완성해 주는 김밥집도 생겼단다. 채식을 좋아하는 사람들 반응이 좋단다.
맨하탄의 첼시마켓 김밥집은 예약하고 줄을 서는 곳이고, 파리에 문을 연 분식집도 그렇단다. 각각 김밥 한 줄의 가격은 14달라, 12유로로 1만 8천원 정도다. 내 나라에선 새벽에 일어나던 엄마의 노동이 공짜고, 사람 밥 걱정하는 인사가 흔하고, 김밥을 먹자면 목 넘길 국물이 있어야 하는데다 라면만 먹자면 그래도 밥은 있어야 쳐다보는 이 마음이 편안한 오지랖이 있다. 집 김밥 좀 싸는 사람은 김밥 몇 줄 대수냐고 생색은 넣어두는데, 한 번 쌌다 하면 열 줄, 스무 줄이라 옆집도 주고, 경비아저씨도 드리고, 배부르다는 자식에게는 김밥 한 줄로 배가 차냐며 기어코 두 줄 세 줄을 먹인다. 공짜고, 후하고, 끼워주고, 거저 주는 이 나라에서 김밥 값을 매기는 기저선은 라면, 파스타, 커피 한 잔과는 딴판일밖에. 김밥이 이 모든 소울을 떼어놓고 훌쩍 외국으로 건너가 가격표를 붙이니 이제야 그 노동과 재료에 맞게 대접받는 느낌이다.
이제 내 나라에서도 갈비, 연어, 감태, 전복처럼 값나가는 재료를 넣어 한 줄에 7천 원 넘는 김밥을 왕왕 만난다. 저렴한 쪽은 편의점 김밥이 맡는다. 신통방통 네이밍을 달고 3천 원 안팎으로 팔린다. 그 중간 가격대는 프랜차이즈 김밥들이 채운다. 김밥을 싯가로 파는 집도 있는데, 가게 유리창에 앞자리 숫자를 떼어내고 ‘김밥 ,000원’이라 해 두었다. 노동의 값을 깎았을테니 오르는 물가를 쇼바 없이 겪는다는 표시겠다.
물려지고 새로워지고 퍼져나가고 버티는 김밥의 기운은 어디서 솟나. 밥, 국, 반찬으로 차려진 할머니와 아빠의 아침상 사이, 언니의 점심 도시락과 야자 도시락 사이, 소풍 가는 오직 한 아이를 위해 말아진 김밥은 다른 집에도 있었던 걸까. 생일 못지 않은 특별한 기분으로 평범한 끼니를 채워주던 그 음식을 모두 알고 있을까. 어제는 나에게 붉으락 푸르락 샤우팅을 하던 엄마가 오늘은 꽃 같은 김밥을 차려준 기억을 지닌 이가 또 있나. 나를 돌보는 이가 어찌 됐든 말아서 어떻게든 살게 해 준 그 아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