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의 오늘
영화 <말아>(2021. 곽민승)는 주인공이 엄마의 김밥가게 ‘신나라 김밥’을 잠시 맡으며 일어나는 일들을 담았다. 실연을 겪고 집에 처박힌 채 딱히 구직 활동도 하지 않는 주리의 자취집은 스스로 돌보기를 미루거나 체념한 흔적들이 널려 있다. 굴러다니는 과자 껍질, 오랫동안 비우지 않은 재떨이, 음식 둘 곳 없을만큼 어질러진 식탁, 겹겹이 쌓인 배달 음식 용기, 바구니에 수북한 빨래들. 엄마로부터 느닷없이 한동안 가게를 맡으라는 명령이 떨어져서 주리는 난생처음 김밥을 말게 된다.
김밥집으로 출근해서 이웃과 새로운 손님을 만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주리가 삶을 천천히 일으켜 세우는 내용이 영화의 흐름이다. 김밥을 만들고, 건네고, 먹고, 나누며 맺어지는 사람들과의 관계 외에도 내 눈에 소중하게 들어온 장면은 주리의 자취집이었다. 늘 먹는 아이스 커피에 쓸 얼음을 만들어 두는 것조차 잊던 주인공이 연습 삼아 김밥을 말아보려고 부엌을 치우고, 조리도구를 꺼내고, 식탁 위를 치운다. 주변은 조금씩 변해간다.
제목 <말아>는 이야기의 끝에 이른 주인공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섞인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영화의 초반에 엄마가 어린 딸에게 이제 세상으로 나와서 살아보라 당부하는 말이기도 하다. 다짜고짜 김밥을 말아보라는 엄마의 말을 ‘살아.’로 바꾸면, 처음인데 어떻게 잘하냐며 투덜대는 모습이나, 이내 스스로 한 번 말아볼테니 믿고 봐달라는 딸의 제스처 역시 ‘내 방식대로 한번 살아볼게.’하는 각오와 찰떡같이 들어맞는다. 영화에서 김밥이 말아지는 순간마다 “말아, 그리고 살아.”, “말다 보면, 살아진다.” 하는 소리없는 대사가 밴 것처럼, 주리와 중요한 시험을 망친 이웃과 실의한 엄마는 말아야 하는 김밥 앞에서 다음 삶으로 스스로를 이끈다.
자연에서 난 재료가 여러 사람을 거쳐 주방에 놓이고, 색과 향과 성질을 지닌 채 손으로 만져지다 음식으로 탄생하는 데에는 분명 커다란 삶의 에너지가 깃든다. 별것 아닌 재료들이 색색이 가지런히 놓였다가, 바쁘거나 외로운 하루를 보내는 사람에게 알맞도록 똘똘 말아 전해지는 만큼, 김밥을 만드는 동안에는 나와 타인의 하루를 긍정하는 속엣말을 지닐 수 밖에 없다.
"내가 잘 말 수 있을까?"
-터지면 어때. 그래도 김밥인데. 일단 말아!
"맛이 괜찮을까?"
-이래도 맛있고 저래도 맛있는 게 김밥이지. 그냥 말아!
"이거 다 말아서 어떻게 하지?"
-말아놓기만 하면 누구든 먹겠지. 김밥이잖아. 그러니까 말아!
주인공처럼 난생처음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았을까. 어제는 참담하고 내일은 막연해도 오늘의 김밥이 가리키는 삶을 긍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 <말아>라는 주문에 담긴 힘이다. 김밥천국 이 나라에서 영화를 만든 감독도, ‘김밥’에 딸려 오는 기억과 감각에 내가 무얼 먹고 있는지 혼란스러운 나도, 우리는 모두 그 주문 걸린 김밥을 먹었나 보다. 말아,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