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을 좀 쉬겠다고 구한 집이었는데
신혼집은 지금도 기억난다. 반지하 투룸인데 화장실이 가관이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밑에 만든 화장실은 천장이 낮아서 일어설 수없을 정도로 불편했다. 한 사람 겨우 고개 숙이고 들어갈 수 있었다. 게다가 화장실 안쪽은 연탄을 쌓아두기도 했다.
화순으로 남편이 발령 났다. 고향 근처로 가서 부모님께 효도하자고 하니 나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따랐다. 시댁 근처로 굳이 찾아가는 것이 호랑이 굴로 자청하여 들어가는 짓이라는 것을 몰랐던 때다. 그때 남편이 먼저 내려가서 사글셋방을 얻어놓았다. 신혼집을 처분하고 남은 보증금 일부로 시댁에 전화를 놓아 드리고 가스레인지를 설치해 드렸다. 그 사글셋방은 창호지로 된 여닫이 문이어서 바람이 방으로 그냥 들어왔다. 그리고 푸세식 화장실이었다.
남편이 무안으로 전출되어 또 남편이 집을 구했다. 일명 공무원 주택이란 것이었다. 마루를 지나 방문을 열면 옛날집처럼 창문이 하나도 없는 방이었다. 나는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몇 년 후에 남편은 다시 서울로 차출 발령을 받았다.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서울에서 집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천에서 집을 구했다. 그 집은 주방 속에 코딱지만 한 화장실이 있는 집이었다. 나는 또 그러려니 하고 그 집에서 수도권 살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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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집을 구할 때 도대체 무엇을 보는지 궁금하다. 남편이 좋고 멋진 집을 얻을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수중에 충분한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은 2년간 매달 월급 전액을 시골의 부모님께 다 보내고 당직 수당으로 살았던 모질이 총각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부창부수라 했던가? 졸업 후에 아버지의 빈자리에서 일할 때 내 것을 한 푼도 따로 챙겨두지 않았다. 그래서 두 손 탈탈 털면서 맨주먹으로 결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헛똑똑이 부부였다. 내 것을 따로 챙길 줄 모르는 것으로는 우리 부부는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