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 3 / 화 2 : 신축빌라를 샀다
중증 환자인 아들을 사정상 퇴원시켜 집에서 간병하기로 했다. 그 이후로 우리의 삶에는 변화가 많았다.
궁여지책으로 마련했던 숲세권 전셋집은 우리가 쉴 수 있는 안식처이긴 했으나 그야말로 여인숙 같은 곳이었다. 집 크기에 비해 뒷 베란다가 엄청 넓었으나 그냥 비워둘 수밖에 없었다. 그 공간이 아까웠다. 주방은 싱크대만 달랑 있고 주방 용품은 갖추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싱크대 상부, 하부 수납장도 텅텅 비어 있었다. 그것도 아까웠다. 그곳 주방에서는 요리를 하지 않았다. 필요할 때 도시락을 싸가거나 음식을 배달시켰다.
아들을 활동보조사들에게 맡겨두고 다른 공간에서 편하게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런 기적이 찾아올 줄 정말 몰랐다. 감사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렇게 가을이 갔다. 눈이 무척 많이 내리던 겨울도 보냈다. 그리고 또다시 봄이 왔다.
그 전셋집 바로 옆에 LH 주공 아파트가 있었다. 그 아파트는 판상형으로 정남향이었다. 무심코 지나다녔던 곳인데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그 아파트를 보면서 내가 남편에게 말을 꺼냈다.
"우리 아들이 저 아파트에 지내면 어떨까? 아마 신청 자격이 될 것 같은데? "
"......." 내 말에 남편은 반응이 없었다.
아들은 독거 중증장애인이고 기초 생활 수급자이니 그 아파트를 신청하면 0 순위로 당첨될 것 같았다. 아들을 그곳으로 내보내고 우리의 아파트를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주공 아파트 입주에 관한 요강을 꼼꼼하게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게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이미 입주자들이 꽉 차 있었다. 입주가가 포기하고 나가는 집이 나오더라도 신청을 해놓고 기다리는 대기자들이 많았다. 조건에 따라 점수를 환산해 보니 생각보다 아들은 점수가 낮았다. 아들이 주공 아파트 입주자로 당첨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맘으로 서류를 갖추어서 신청을 했다. 예상했던 대로 당첨 결과는 꽝이었다.
그러나 '신축' 주공 아파트 청약이라면 아들에게 분양 우선권이 주어지긴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신축 아파트가 가까운 곳에 분양될 확률이 거의 없고 설령 당첨된다 하여도 몇 년은 기다려야 입주가 가능한 일이었다. 주공 아파트가 아들에게 주어졌을 때 얻는 유익은 일정액의 월세를 감면받는 정도였다. 그래서 아들을 주공 아파트에 입주시켜 보겠다는 생각은 몇 달 만에 접고 말았다.
32평, 정남향, 거실이 넓은 우리 아파트에 있다가 투룸 전셋집에 들어가면 창살 없는 감옥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아들이 24시간 활동보호 대상자로 선정되고 나니 전셋집에서 생활해야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서서히 요리도 하고 빨래도 해야 했다. 처음 전셋집을 얻을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다. 점점 대부분의 생활을 그곳에서 하게 됐다. 그 전셋집은 그런 용도로 구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일주일에 몇 밤이라도 잠을 자려고 얻은 집이었다.
우리 아파트에는 6인용 식탁이나 커다란 진열장이 쓸모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넓은 거실, 화장대와 드레스룸을 보면 내가 사용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속이 쓰렸다. 이건 질투라는 감정과는 좀 달랐다. 나의 기득권이 누군가에게 짓밟히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못하는 얄궂은 감정이 디밀고 올라왔다.
투룸 전셋집에서 여생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단을 해야 했다. 남편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 아무래도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눈을 못 감을 것 같아."
남편은 내가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고 했다.
"그러면 대책을 세워봐야지. 당신이 눈을 못 감는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
우리는 전셋집을 처분하고 제대로 된 집을 마련하여 아들과 활동보조팀을 내보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그 아파트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 1 가구 2 주택법'에 걸려서 맘에 드는 아파트를 장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파트 같은 느낌이 드는 신축 빌라를 알아보기로 했다. 물론 공시지가를 조회해 가면서...
"이거네. 이거."
우리 부부는 서로 마주 보며 하이 파이브를 하고 그 집을 사기로 했다. 그런데 그 집을 계약하기 전에 우리에게는 남다른 걱정이 생겼다.
중병 환자를 옮기며 하는 이사를 생각하면 머리부터 아팠다. 와상 환자에게 필수적인 욕창 방지 에어 매트를 미리 옮겨 두어야 하고 이삿날에는 어쩔 수 없이 온종일 아들을 휠체어에 태워 두어야 한다. 게다가 환자용 콤비네이션 침대는 전문가를 불러야 이동이 가능하다. 물론 장콜을 불러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포장 이사를 불러서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이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신축빌라의 엘리베이터는 아파트에 있는 것과 비교해 보니 더 좁았다. 대형 휠체어를 타는 아들이 일 년에 한 번씩 위루관 시술을 하러 병원 행차를 하는데 아무래도 좁은 엘리베이터가 문제될 것 같았다.
"차라리 우리가 이곳에서 살까? 새 집이고 좋잖아? 방도 3개고 화장실도 2개잖아?"라고 남편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남편은 일 무끼가 아니어서 복잡한 일은 일단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아들을 옮기는 일을 생각만 해도 그는 벌써 멘붕이 오는 모양이었다.
"그럴까? 잡동사니 짐은 아파트에 그대로 놔두고 필요한 것만 세팅하여 살면 되지."
라고 내가 말했다. 이럴 때 우리 부부는 마음이 잘 맞는 것 같다.
그 신축빌라의 공시지가는 아슬아슬하게 1억 미만이었다. 신축 빌라는 공시지가가 매매가에 비해 꽤 적게 책정되어 있었다. 휴우, 다행이었다. 아파트 같은 느낌이라 공시지가가 1억을 넘으면 어떡하나 하고 마음을 졸였다. 그래서 수천만 원씩 부담해야 하는 취득세 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공시지가 1억 미만이면 취득세 중과 대상에서 제외되는 법이 있었다.
일사천리로 집을 계약했다. 구입 자금은 전셋집을 빼고 또 오래전부터 지니고 있었던 작은 빌라를 팔면 쉽게 해결될 것 같았다.
2021년, 그때는 집을 내놓기만 하면 팔렸다. 그 작은 빌라는 부동산에 내놓은 당일 저녁에 팔렸고 전셋집은 내놓은 지 한 시간 만에 팔려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곧바로 전세금을 돌려받았다. 마치 편의점에서 라면 사듯이 '방 3, 화 2' 신축빌라를 샀다.
"요즘 갭투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빌라는 내놓기가 무섭게 팔린대요."라고 한 지인이 말했다. 그때는 집을 파는 일이 무척 쉬웠다. 아마도 빌라왕들이 흡입하듯이 공시지가 1억 미만인 빌라를 마구 사들이던 때였던 것 같다.
방 하나를 황토 타일로 시공하고 빗물받이에는 인조 잔디를 부착했다. 실내 자전거와 노젓기 운동기구, 안마 의자 등을 세팅하여 그 집을 힐링의 공간으로 꾸몄다. 세탁기, 냉장고 등도 들이고 간단한 취사도구와 주방 용품도 챙겨 왔다. 우리는 주로 그 빌라에서 기거했다.
아들이 있는 아파트는 간병하기 위해서만 들렀다. 내가 할 일이 끝나면 부리나케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그래야 활동보조사들도 맘이 편할 것 같았다. 나는 내 집에서 눈치를 보며 나오곤 했다.
그러나 방학이 되어 낮시간을 집에서 보낼 때면 아파트에서 느끼는 기분과는 많이 달랐다.
할 수만 있다면 아들을 25평 정도의 아파트로 옮기고 우리가 그 집을 되찾아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들의 병실용으로 32평 아파트 전부를 제공하는 것은 뭔가 비경제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넓은 공간이 불모지처럼 방치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냥 맘을 비우고 아들은 아파트를 차지한 채로 지내고 우리는 신축빌라에서 세컨 하우스 살이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아들에게 동반의존하여 살아가는 신세일뿐이다.
[사진: 신축빌라 평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