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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찬양Lim Jan 27. 2023

숲세권 전셋집이 우리에게 준 선물

- 숨을 좀 쉬겠다고 구한 집이었는데

한순간의 자전거 사고로 병원 생활을 시작한 지 7년 만에 아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완쾌하여 퇴원한 것이 아니라 병원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울며 겨자 먹기로 내린 결정이었다. 아들이 돌아오는 순간부터 우리의 안방은 아들의 병실로 변했다.


안방에는~

경사 침대를 겸한 환자용 침대, 보호자용 침대, 전동 자전거가 놓였다. 그리고 대형 휠체어가 그 방으로 들어와야 했다. 그보다 더 심한 것은 아들을 휠체어에 싣고 내릴 때 이용하는 리프트도 들락거리게 되었다. 말하자면 병원 특실처럼 아들 혼자 안방을 떡하니 차지했다.


뒷방은~

아들의 휠체어나 리프트기, 짐볼 등을 둔다. 게다가 아들에게 사용되는 다양한 종류의 기저귀와 휴지, 티슈, 물티슈, 청소포 등이 마치 택배사의 창고처럼 잔뜩 진열되어 있다.


안방 드레스룸이나 화장대 공간은~

아들의 목욕 용품이나 이발 도구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상부 수납장에는 활동보조사들의 화장품과 세면도구가 놓여 있다.


작은 방에는~ 

2인조 야간 근무 활보사 중에서 한 분이 쪽잠을 청하여 잘 수 있는 침대가 세팅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 부부가 맘 편히 머무를 곳이 없는 우리 집이다. 우리 집이긴 한데 더 이상 우리 집이 아니다. 우리 집은 그냥 최고급으로 꾸며진 병실이다. 더 이상은 우리의 안식처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세컨 하우스를 찾아 나섰다. 쉴 곳이 필요했다.

1 가구 2 주택이라는 제약 때문에 우리는 공시지가 1억 미만인 집을 보러 다녔다. 우리의 경우는 공시지가 1억 미만인 집을 구해야 취득세 등의 중과세를 면할 수 있었다. 연일 집을 알아보았지만 맘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집 구했어."

산책 나갔던 남편이 상기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숲세권이야. 공원에서 1분도 안 걸려. 심지어 정남향이야."

"잘 됐네. 그런 집이 있었네요. 세컨 하우스로 딱이네요."

"요즘 눈 씻고 찾아도 없는 전세야, 전세."

그랬다. 그때는 은행 이자가 낮아서 집주인들이 전세를 내지 않던 때였다.

"그거 잘 됐네요."

나는 그렇게 말은 했으나 그 집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편의 집 고르는 안목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기둥이 있고 지붕만 있으면 집이라고 여기는 사람 같았다. 그가 혼자서 구한 집은 하나같이 제대로 된 집이 아니었다.

신혼집은 지금도 기억난다. 반지하 투룸인데 화장실이 가관이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밑에 만든 화장실은 천장이 낮아서 일어설 수없을 정도로 불편했다. 한 사람 겨우 고개 숙이고 들어갈 수 있었다. 게다가 화장실 안쪽은 연탄을 쌓아두기도 했다.
 
화순으로 남편이 발령 났다. 고향 근처로 가서 부모님께 효도하자고 하니 나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따랐다. 시댁 근처로 굳이 찾아가는 것이 호랑이 굴로 자청하여 들어가는 짓이라는 것을 몰랐던 때다. 그때 남편이 먼저 내려가서 사글셋방을 얻어놓았다. 신혼집을 처분하고 남은 보증금 일부로 시댁에 전화를 놓아 드리고 가스레인지를 설치해 드렸다. 그 사글셋방은 창호지로 된 여닫이 문이어서 바람이 방으로 그냥 들어왔다. 그리고 푸세식 화장실이었다.
 
남편이 무안으로 전출되어 또 남편이 집을 구했다. 일명 공무원 주택이란 것이었다. 마루를 지나 방문을 열면 옛날집처럼 창문이 하나도 없는 방이었다. 나는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몇 년 후에 남편은 다시 서울로 차출 발령을 받았다.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서울에서 집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천에서 집을 구했다. 그 집은 주방 속에 코딱지만 한 화장실이 있는 집이었다. 나는 또 그러려니 하고 그 집에서 수도권 살이를 시작했다.

***   ***   ***
남편은 집을 구할 때 도대체 무엇을 보는지 궁금하다. 남편이 좋고 멋진 집을 얻을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수중에 충분한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은 2년간 매달 월급 전액을 시골의 부모님께 다 보내고 당직 수당으로 살았던 모질이 총각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부창부수라 했던가? 졸업 후에 아버지의 빈자리에서 일할 때 내 것을 한 푼도 따로 챙겨두지 않았다. 그래서 두 손 탈탈 털면서 맨주먹으로 결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헛똑똑이 부부였다. 내 것을 따로 챙길 줄 모르는 것으로는 우리 부부는 똑같았다.

"근데 말이야. 집이 너무 낡았어. 그렇지만 가격 대비해 괜찮은 것 같아."

"그래요? 그렇다면 방법이 있어요."

"뭔데?"

"우리가 원하는 대로 그 집을 리모델링하고 그만큼 전세 보증금을 올려 주겠다고 하세요."

그 집주인은 땡잡았다. 우리는 전세금 1/4 정도의 돈을 투자하여 모든 창틀을 신형으로 교체하고 멋지게 집을 리모델링했다. 집이라는 것은 손만 잘 보면 금방 새로운 딴 집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숲세권 정남향 2층, 투룸 전셋집을 깔끔하게 리모델링하여 계약했다. 전세는 보증금을 날릴 위험이 있으니 계약과 동시에 주소를 전입하고 확정일자를 받아야 했다. 우리는 아들이 있는 32평 아파트에서 나왔고 주소도 옮겼다.


그렇게 얻은 세컨 하우스는 뽀대 나는 별장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참 좋았다. 특히 나는 그곳에서 보름간 자가격리를 한 적이 있다. 학교에 한 명의 학생이 코로나에 확진되어 그 교실에서 수업을 했던 교사는 자가 격리 대상이 되었다. 물론 학교 전체가 보름간 비대면 수업을 했었다. 위드 코로나 이전에는 그랬다. 그때 이 세컨 하우스는 그야말로 톡톡히 한몫을 했다. 쉬는 시간마다 남으로 난 창을 통하여 푸른 하늘을 보고 숲과 꽃을 봤다. 커피를 마시며 즐기는 유유자적함으로 친다면 그런 아름다운 유폐가 없었다. 그해 봄은 가장 서글퍼야 할 상황이었지만 그 전셋집에서 나름 낭만을 즐겼다.


그런데 우리가 세컨 하우스를 구한 것이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우리 아파트에서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아들은 '독거 중증 장애인'이 되었다. 그것은 아들이 기초 수급자가 되는 요건이 되었다. 그 조건은 자연스럽게 아들 24시간 활동보조 대상자로 선정되도록 하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그래서 아들은 24시간 교대로 활보조사들의 돌봄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숲세권 전셋집 세컨 하우스에 살기 시작한 것은 우리에게 어마한 행운이었다. 그 집이 우리에게 큰 선물을 안겨준 셈이다. 아들을 24시간 돌볼 인력이 제공되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들의 간병에서 물러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기약 없 아들의 간병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우리에게는 큰 위로였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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