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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찬양Lim Mar 12. 2022

"안폰카 신시마~"(저작권 없음)

- 코로나 시대의 기록 남겨두기

 시대마다 전쟁을 겪는 건가? 시대마다 나름의 어려움이 있겠지. 지금 전 세계는 코로나와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코로나 시대 이후에, "나 때는 말이야, 말도 마라, 코로나가 얼마나 극성을 부렸는지."라고 썰을 풀 날이 있을 것 같다. 누군가는 코로나 시대의 상황에 대한 기록을 생생하게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뵌 적은 없는데 얼핏 듣기로는, 벌목을 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갔다가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고 했다. 감옥살이를 하다가 귀한 생명을 저버려야 하는 시대가 있었나 보다.


어머니: 어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나서 열 살까지 그곳에서 살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귀국선(歸國船)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오셨다고 했다. 나라를 잃고 창씨개명을 하며, 주권도 인권도 유린당했던 시대의 아픔도 알겠다.


6.25 전쟁: 혈육을 잃고 하루아침에 천애고아 (天涯孤兒)가 되거나 부부가 남남이 되는 가슴 아픈 사연들이 너무도 많은 시대였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시그널 뮤직을 울리며 진행되었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프로를 보면서 함께 울었던 시절이 있었다.

  https://vibe.naver.com/today?playTrackItems=2061484('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민주주의를 위하여: 그 해, 우리는 내장산에 있었다. 난데없이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뉴스가 내장산 스피커에서 울려 나왔다.

"지금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은 동요하지 마시고 차분하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대통령께서 괴한이 쏜 총탄에 맞아서 서거하셨습니다."

그 해 10월의 단풍은 아름답다고 여겨지기보다는 울며 흔들리는 듯했다. 우리들은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여행지를 빠져나오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 창에서 바라보는 산하는 울음을 삼키며 버티고 있었다. 그 이후에, 최루탄이 거리를 덮고 시도 때도 없이 데모가 일어났다.  '5.18'이라는  시대적 아픔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하여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다양한 역사를 보여주는 듯한 나무 모습- 북경에서

IMF 외환 위기: 사람들은 직장을 잃고 겪어보지 못한 가난 속으로 들어가야 했었다. 몸에 지니고 있던 금붙이를 팔아치웠다. 내가 지니고 있던 반지며 목걸이도  'IMF 금 모으기'에 모두 날렸다.


사스(SARS), 신종플루, 메르스(MERS): 이런 것이 올 때도 우리는 벌벌 떨었다. 그러나 곧장, 타미플루 같은 것을 처방받으면 그만이었다. 한두 달 우왕좌왕하며 대처하면 위협의 힘을 잃고 스러져가 버렸다.


코로나19(COVID19): 코로나가 슬며시 우리 삶에 난입한 후 세상은 급하고 희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 여행 물리기

  그날 우리는, 막 개통된 연륙교를 이용하여 무의도에 가기로 했었다. 하나개 해수욕장을 지나 바다 위를 걷는 즐거움, 해안 데크길 산책을 하기로 했었다.

"안돼요, 코로나~ 이거 엄청 무서운 거래요, 일단 멈춰요" 웬만해서는 겁이 없는 조카가 계획해두었던 여행을 무르자고 했다. 조카는 이미 코로나에 대해 낱낱이 읽어두었던 모양이었다. 그게 뭘까? 어리둥절해하면서 여행을 물렀다.

'위드  코로나'에 들른 무의도 해변, 그리고 갈매기

  -마스크 구하기

  우선 급한 것은  마스크를 구하는 일이었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있는 세상이 됐었다. 생년월일에 따라서 지정된 날짜에 약국에 가서 한정적으로 마스크를 구매했었다. 모든 공원의 시설물은 테이프로 감기고 어디에도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거리에는 강아지마저 마스크를 끼고 나오는 세상이 되었다. 그리운 사람들과도 외면하며 지냈다. 카페에 갈 수도, 맛집에 가서 식사를 할 수도 없었다. 짧은 여행을 떠나도 음식을 포장하여 사 와서 차 안에서 먹어야만 했다. 세상은 창살 없는 감옥보다 더 숨 막히는 곳으로 바뀌었다. 안전한 곳이 없었다. 외출을 할 때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안폰카 신시마~"라고. 이것은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든 모토 같은 것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제시카가 부르는 것처럼 패러디하여, '경, 휴대, 드, 발, 계, 스크'를 챙겨서 외출해야 되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마스크를 챙겨서 나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신발: 출근할 때 구두 신기, 퇴근할 때 실내화 끌고 나오지 않기)


   -자가 격리

   내가 수업했던 교실의 학생 한 명이 코로나에 확진됐다. 곧바로 선별 진료소에 가서 PCR 검사를 했다. 학생 재적만 천 명이 넘는 학교이니 선별 진료소에 길게 늘어선 검사 대기자의 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도망가지 마세요. 도망가지 마세요."

  검사용 면봉이 콧 속 깊게 쑥 들어오니 본능적으로 고개를 뒤로 뺄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이 바로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그런 핀잔을 들으니 민망했다. 그날부터 2주간 나만의 공간에 밀폐되어 세상과 단절되었다. 하늘은 무심하게 푸르렀고 5월의 초록도 창틀 너머에서 나풀대고 있었으나 사는 게 재미가 없었다. 그곳에서 원격으로 수업을 하고 업무처리를 했다. 매일 자가격리 앱에 상황을 입력하고 인공위성을 통한 감시를 당하는 죄수 같은 신세가 되었다. 보름간 신발을 신어보지 못했다.


    - 원격수업

   그토록 중요하다며, 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ies:정보통신기술) 기반 수업을 외쳐왔는데 코로나가 덮치면서 디지털 혁명의 시대가 썰물처럼 밀려왔다.

메타버스(metaverse) 시대로 훌쩍 뛰어넘었다. 하루아침에 스마트 교실이 되었다. 다양한 플랫폼이 있었고, 우리 학교는 'EBS 온라인 클래스'를 통하여 원격수업이 이루어졌다. 신속하고 민첩하게 학생들과 교사들이 새로운 시스템으로 적응해갔다. 쌍방향 화상수업은 영어수업에는 효과가 좋았다. 학생 개개인의 영어 '읽기와 말하기'가 화상을 통하여 보이고 들릴 때 동료학생들은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지루하지 않아서 좋았다. 교사는 교수 · 학습 과정을 재구성하여 원격에 유리한 것과 대면 수업에서 해야만 하는 것을 미리 수업 일지에 정리해두었다. 코로나의 상황에 따라서 어떤 형태의 수업으로도 자연스럽게 스위치 할 수 있었다.


   - 대면 & 비대면 동시 형태

   대면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 교회는 소속 노회의 대형 교회가 실시간 유튜브 예배를 드릴 때 동참했다. 몇 개월 그렇게 하다가 끝을 알 수 없는 일이어서 독자적으로 실시간 쌍방향 예배를 드렸다. 그 예배의 장점은 먼 곳에 있는 지인도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대면 & 비대면 동시 예배를 드리고 있다. 현지에 있는 성도들은 현장에서 예배를 드리고 동시에 비대면 성도들도 화면으로 함께 동참할 수 있다. 상상을 해보지 못한 예배 형태다. 대면 & 비대면으로 쌍방향 동시 예배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학교나 학원 혹은 회사의 연수 및 회의 등에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는 형태라고 생각한다.



  (TIP: 자신에게 필수적인 것을 이니셜로 정리하여 부르시면 됩니다.)

 시대는 '위드 코로나'인 것 같다. 이제 멧돼지 모습처럼 마스크를 끼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이상하지도 않다. 오히려 마스크를 끼지 말라고 하면 스스로 불안할 것 같다. 나는 하루에 세 번, '안폰카 신시마'를 외친다. 아침에 출근할 때, 퇴근할 때, 아들이 투병하는 집에서 간병을 끝내고 나올 때. 현관문 앞에서 제시카가 부르던 곡에 맞추어 '안폰카 신시마'를 외친다. 그래서 절대로 마스크를 깜빡하고 밖으로 나오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좋다.
"안폰카 신시마"라고 외친다: 일명, '제시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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