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은 모였다 하면 식구가 한 부대만큼 많았다. 나는 그 문중의 17대 종손이고 또한 7남매 맏며느리다.
결혼 후에 뭣도 모르고 일독에 빠져 살았다. 앞에 펼쳐진 일을 해치우느라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 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꾀를 부리거나 못한다고 했어도 됐을 것 같다.
명절에 친정에 갈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상황상 시댁을 빠져나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많은 식구들과 찾아오는 집안 어른들을 챙기다 보면 그냥 친정은 없는 요량하고 살아야 했다.
시누이나 시동생을 끼고 살아야 할 때가 있었다. 시누이나 동서의 산후조리도 했다. 썩 잘하지는 못했지만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내 앞에 벌어지는 일은 내 몫이라고 여겼다.
어느 명절엔가 모인 사람의 수를 세 본 적이 있다. 모두 33명이었다. 지금은 더 많아졌다. 그럴 때는
개 한 마리, 돼지 한 마리 정도는 거뜬히 해치웠다.
생굴을 껍질 째 몇 자루 챙겨 오면 그걸 데쳐 '동물의 왕국'처럼 모두 고개를 수그리고 다 까먹었다. 잠시 후에 보면 굴 껍데기가 몇 포대나 됐다.
그 해 추석에도 그렇게 모두들 굴을 까먹고 있었다.
"우리, 이거 한 번 먹어봐요. 우리 교회 집사님이 담가 주신 거예요."라고 하며 막내 동서가 김치 통을 열었다. 그 순간 주방 가득히 향긋한 향이 퍼졌다. '감태지'라고 했다. 생전 처음 먹어 본 맛, 그 향긋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며느리 넷은 그 자리에 앉아서 감태지를 먹기 시작했다. 며느리들도 식성이 좋았다.
시댁 원가족들이 잘 먹어 치운다고만 할 것도 아니었다. 우리 며느리들도 감태지를 그냥 한 자리에서 다 해치울 판이었다. <확 깊은 집에 주둥이 긴 개가 들어온다.> 라던 옛말이 옳았다.
그날 우리는 자녀들의 장기 자랑을 봤다. 대학 3학년이던 아들은 그 장기 자랑에 사회를 봤다.
'어느새 자라 저렇게 어엿하게 가족들 앞에서 사회도 보네.'
내심 그런 아들이 든든하고 멋져 보였다. 뿌듯했다.
응원 단장이었던 딸은 응원곡에 맞춰 한 바탕 신나게 쇼를 했다. 아들은 사회를 보던 중간에 CCM도 부르고 노래도 했다. 딸은 아들이 부르는 노래에 피아노 반주를 했다. 더 이상 부러운 것이 없던 명절이었다. 이제 애들을 다 키웠구나,라고 생각하며 행복하게 보냈다.
'저 녀석이 노래도 잘하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아들의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틈틈이 주방으로 달려가 감태지를 집어 먹었다. 입안에 남아 있는 향이 은근 중독성이 있었다. 계속 먹고 싶었다. 아들의 노랫소리가 감태지의 향과 어우러졌다. 분위기 있는 바닷가에 가 있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때 아들이 불렀던 노래를 지금도 기억한다.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낫씽 베럴'이었다.
근데,
"엄마, 프랑스에서 친구 '앙리'가 들어왔다네요. 지금 포항으로 갈래요."
아들은 급하게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일상이 늘 바쁜 녀석이었다. 부지런히 살고 있는 듯했다. 스물세 살, 그때는 인생에서 가장 바쁠 때였다.
그날 아들을 본 것이 마지막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니 감태지를 그렇게 맛있게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작별 인사하고 떠났던 아들은 한 달쯤 뒤에 사고를 당했다. 현재 인지는 제로 상태, 그리고 몸은 전신 마비가 되어있다.
12년을 병상에 누워있다. 금방이라도 "엄마~ "라고 할 것 같은 아들은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다. 아들은 밤에는 자고 낮에는 깬다. 그러나 자는 것이나 깬 것이나 매 일반이다. 눈을 떴다는 것과 감았다는 차이 밖에 없다. 아들은 온통 밤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야, 너의 이름은 벽창호야."
나는 아들에게 그렇게 말한다. 엉엉 울며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차라리 그렇게 개그로 현실을 헤쳐나가는 게 더 편했다. 아들 앞에 가면 그래서 개그를 몇 번 쳐준다. 눈물을 흘리는 대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