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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May 16. 2024

아날로그를 거쳐  디지털로~

-  A로 시작하는 Album(앨범)

초, 중, 고,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졸업 앨범을 한 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 게다가 친정어머니께 전해받은 사진 꾸러미도 지금 내게 없다. 그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졸업 앨범과 같은 아날로그 사진첩은 어떤 공간에 챙겨 두어야 한다. 디지털 사진은 온라인상에 탑재해 두면 언제라도 쉽게 볼 수 있다. 여하튼 아날로그 필름 사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초등, 중학교의 졸업 앨범을 고향 집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다. 올망졸망 5남매가 한꺼번에 책가방을 멨던 시절은 전쟁 아닌 전쟁이었다. 그 와중에 우리의 졸업 앨범 따위가 제대로 건사됐을 리 만무다. 부모님은 자식들 공부 뒷바라지로 바쁜 나머지 그 많았던 졸업 앨범을 펼쳐보신 적이 없었다.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나 역시, 여태껏 그 졸업 앨범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생뚱맞게 그걸 들춰보고 싶어졌다. 졸업 앨범을 내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한 장씩 넘보고 싶다. 어떤 페이지에서 절로 웃음이 터질 게 뻔하다. 그러나 나는 졸업 앨범이 없다. 렇게 졸업 앨범을 내팽개쳐 두었으니 내가 추억 부자가 되긴 글렀다.


고향의 오두막집은 우리의 학자금에 보태려고 헐값에 팔렸다. 그래서 집안에 있 것대부분 불에 태웠다. 그때 졸업 앨범은 불 쏘시개가 되어 훨훨 타 버렸을 것 같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는 졸업 앨범 구입 건에 대해 부모님께 말을 꺼내지 않았다. 친구들은 내가 왜 앨범을 구입하지 않는지에 대해 묻지 않았다. 집안 형편을 생각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졸업 앨범은 우리 집 형편 '발에 편자'다. 두메산골에서 5남매를 대학 과정까지 교육시키는 부모님께 그런 것까지 구입하겠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요즘은 디카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보관하니 필름을 현상할 필요가 없다. 처음으로 디지털 사진을 접했을 때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필름을 사진관에서 현상하지 않는 것이 영 어색했다.

요즘은 누구나 사진을 쉽게 찍는다. 사람들은 절경이나 예쁜 꽃이 있으면 주저 없이 사진을 찍는다. 그들은 스마트폰에 내장된 화소 높은 디카를 잘 사용한다. 맘껏 찍은 사진을 온라인에 차곡차곡 탑재해 두면 언제라도 챙겨 볼 수 있다.

디카 사진의 장점은 많다. 아날로그 사진과 가히 비교할 바가 아니다. 다양한 필터를 이용하여 사진을 보정할 수 있다. 아무렇게나 사진을 찍은 후에 쓸모없는 부분은 'AI 지우개' 기능을 사용하여 지우면 된다. 그래서 멋진 사진을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다. AI가 만들어 주는 프로필 사진 또한 기가 막힌다. 나르시시즘에 빠질 정도로 내 모습을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고향 집 안방 벽에는 사진 액자가 걸려 있었다. 사진이 몇 장뿐이니 액자에 넣어 보관했다. 사진 액자 옆에 <피리 부는 소년>도 걸려 있었다. 작은방 벽에는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이라는 그림도 있었다. 초가삼간이었지만 아버님은 그런 그림을 걸어놓을 정도로 나름 낭만쟁이셨다. 유년 시절에 그 그림을 쳐다보며 몽환적인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다. 그림 액자에는 파리똥과 먼지가 잔뜩 끼어 지난한 꼬락서니였지만 적어도 내게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고향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사진 액자를 벽에 내걸었다.




어머니는 몇 년 만에 한 번씩 상우계에서 봄놀이를 가곤 하셨다. 마을 동리계에서 원족을 떠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몇 장씩 단체 사진을 받아 오셨다. 그 사진을 한가하게 앨범에 정리할 틈이 없었던 어머니는 대형 봉투에 쑤셔 넣어 두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니가 간직하는 것이 제일 낫겠다."


어느 해였던가? 사진이 담긴 대형 봉투 하나를 내게 건네주셨다. 고향집은 없어지고 어머니는 자식들 집으로 옮겨 다니며 사실 때였다. 어머니로서는 그것을 야무지게 보관해두고 싶었던 것 같았다. 


"니가 이다음에 앨범을 장만해서 잘 정리해라."


그때만 해도 5남매 중에서는 내가 사는 것이 안정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그 사진을 내게 맡기셨으리라.  내 아들이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 삶은 평온했었다. 그러나 아들이 갑자기 사고를 당하여 중증환자로 병상 생활을 하면서부터 내 삶은 회오리바람을 맞은 듯 출렁댔다. 

사람이 큰 일을 당하면 그 언저리의 기억을 다 잊어버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들이 당한 사고 때문인지 나는 어머니께 전해받은 대형 봉투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


그 봉투를 받은 후에 두 번 정도 이사를 하긴 했다. 그즈음에 집안에 있던 책을 몽땅 헌 책방에 넘다. 그 바람에 어머니가 맡겨두신 사진 꾸러미가 도매급으로 넘어갔을 것 같다. 사실, 그 사진은 어머니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보존의 가치가 제로인 셈이다. 그래도 어머니가 사진 뭉치를 보자고 하시면 어쩌지? 라며 늘 나는 맘이 편치 않았다. 

그것을 도대체 어디에 두었는지? 단서가 될 만한 기억이 한 톨도 없다.


어머니는 지금 요양원에 계신다. 섬망 증세도 심하고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신다. 다행히 그 사진 꾸러미에 대해 한 번도 내게 묻지 않으셨다. 그 사진 봉투를 내놓으라고 어머니가 패악질 부리시면 난감할 판이다. 




정년 퇴임을 한 요즘은 나름 시간적 여유가 있다. 그래서 집안에 쌓여 있는 아날로그 앨범을 새롭게 잘 정리해 볼 참이다. 디지털 시대에 그런 작업을 하려니 번외 노동 같다. 번거롭기 짝이 없다.


캠코더에 찍어 두었던 영상을 디지털 영상으로 환해 두는 작업도 할 참이다. 그 캠코더를 당시에는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몇 번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디카 시대가 도래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그 캠코더를 사지 않았을 것이다. 소중한 것이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됐다. 눈을 뻔히 뜨고 사기당한 기분이었다. 격변시대가 가져온 해프닝이었다.


디지털 혁명이 그토록 급하게 불어올 줄 몰랐다. 바야흐로 인공지능 AI시대에 안착 있다. 모든 것이 급변하고 있다. 그러나 아날로그 감성으로, 레트로 낭만으로, 앨범을 잘 정리해 볼 참이다.


사라져 가는 것에 미련이 생긴다.
아쉽다.  
옛 것은 그것대로 의미를 부여하되
새로운 것에 스며들어야 하는
기로에 있다.

[대문사진:위키백과]

#아날로그  #디지털  #밀레  #피카소  #캠코더  #졸업 앨범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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