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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찬양Lim Apr 09. 2022

'아이디어'로운 간병 생활

- 'The 샅바'의 이름을 공모합니다.

  그날은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신이 났었다. 출근을 하지 않고 포항행 국내선 비행기를 타는 기분이 참 묘하고도 좋았다. 전날 밤에 부재중 통화 내역이 한가득이었다. 아들이 머리 수술을 했다고,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던 딸이 연락을 계속 시도했던 것이다. 아침에야 딸과 통화가 되었고 아들이 자전거에서 넘어졌다고 했다.


- 자전거에 넘어졌는데, 뭐.

- 그래, 무슨 큰 일이야 있겠어?

- 다리나 팔을 다치지 않고 머리를 다쳤네? 그럴 수도 있겠네.

- 짜식ㅠㅠ 겁도 많은 데 많이 놀랐겠네

- 아깝다! 며칠 전에 멋 낸다고 파마했던데? 수술한다고 삭발했겠네.

- 수술은 잘 됐겠지?

- 요즘은 의술이 좋아서 간도 뗐다 붙였다 하는데, 뭐.


  중환자실에 들어가니 머리를 붕대로 칭칭 감고 오른쪽 눈두덩이는 숯검댕이처럼 꺼먼 채로 아들이 누워있었다. 인공호흡기를 꽂고 있었고 아무 의식도 없는 딴 세상 사람 같았다. 세데이션이라고 불리는 수면 유도 상태였다.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의 말로는 목숨만 건졌다고 했다. 다리에 힘이 확 풀렸다.


- 정신을 차리자, 여기서 내가 정신을 잃으면 안 되지.

[그 자전거]

   최면을 걸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다리에 힘이 약간 돌아왔다. 침대 난간을 잡아서 쓰러지지는 않았다. 남편은 빗물 같은 눈물을 주르륵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사람의 눈 속에 많은 물기를 담고 있다가 그런 순간에 다 퍼내는 것일까? 극적인 상황이 내 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렇다면 드라마에서처럼, 나는 놀라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야 하고 얼마 후에 아들은 깨어나야 하고.. 드라마에서나 그런 것이 있었나 보다. 2012년 11월 7일, 우리 가정에는 큰 사변이 일어났다. 딸은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부어 있었다.  하루아침에 우리는, 위로가 엄청 필요한 기구한 가정으로 바뀌었다. 자전거 사고가 났던 캠퍼스에 가보니 11월의 밤공기는 쌀쌀했다. 아들이 탔던 자전거는 얌전히 펜스에 묶여 자물쇠까지 채워져 있었다. 아들이 자전거에서 넘어진 후에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서 그렇게 해둔 것이었다. 얼굴에 있던 핏물을 씻은 후에 앰뷸런스를 부르고 병원에 갈 때까지만 해도 절체절명의 사고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 제가 죽을 만큼 아파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아파요.


  CT 검사 판독으로 이상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의사의 말에, 아들은 다시 한번 더 정밀한 검사를 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MBTI 유형 중 ENTJ인 아들이 할 수 있는 제스처였던 것 같다. 그때 병원문을 열고 나갔더라면 골든 타임을 놓쳤을 것이다. 다시 검사를 하려는 순간에, 동공이 확대되고 정신을 잃은 상태로 10년 째 저러고 있다. 뇌 속에 있던 출혈된 피를 뽑아내어 초승달 모양이던 뇌가 동그랗게 된 사진을 보여주며, 수술 담당의사는,


- 지켜봐요.


라고 했다.  일주일 정도 숨 죽이며 중환자실 면회 시간을 꼬박꼬박 지켰다. 그런데 수술 후유증으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자가 호흡이 미미하게 돌아왔다고 했다. 앞이 캄캄한 상황에서, 사고 소식을 들은 아들의 친구 아버지의 말이 생각났다.


- 너무 상심이 크시겠어요. 서울로 오시게 되면 꼭 연락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분의 도움이 참 컸다. 서울로 향하는 길은 내내 가슴이 쿵쾅거렸다. 서울에 도착하기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앰뷸런스를 타고 영화를 찍듯이 달려본 적이 없는 자들은 우리의 심정을 모를 것이다. 홍해가 갈라지듯 고속도로의 차들은 양갈래로 길을 비켰고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는 서울까지 멈추지 않고 앵앵거렸다. 무섭고 불안했다.


  위기를 넘기고 한 달 정도의 병원 생활이 끝나니 퇴원을 해야만 했다. 대학병원에는 4주간 입원할 수 있는 법이란다. 우린 아들이 깨어나고 모든 치료가 끝난 후에 퇴원하는 줄 알았다.


- 신경외과적인 치료는 끝났습니다. 이제부터 재활을 하셔야 합니다.


  아들의 위급한 순간을 치료해주셨던 의사가 말했다. 병원에서는 쫒아?내고 우리는 갈 곳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들은 중증 환자여서 휠체어에 싣고 내리는 일이 불가능했다. 그 병원에는 '리프트기'라는 게 있었다. 치료실로 가려면 환자를 휠체어에 실어서 이동해야 하는데, 이송팀이 리프트를 끌고 와서 슬링으로 아들을 감싸서 싣고 내리는 일을 해주었다. 다음에 갈 병원은, 그것으로 환자를 싣고 내리는 일을 해주는지 알아봐야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당시에 서너 군데의 병원에서 그것을 활용하여 환자를 싣고 내린다고 했다. 대부분의 병원은 침대를 통째로 밀고 이동하여 진료를 보러 다니는 게 전부였다. 대학병원 10군데 정도에 입원 신청을 했지만 입원하라는 연락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재활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리프트는 없었지만 병실의 간병사들이 몽땅 힘을 합쳐서 아들을 휠체어에 싣고 내리곤 했다. 욕실로 갈 때, 이송용 침대로 옮기기 위해서 5명이 달라붙어서 침대 시트로 아들을 담아서 옮겼다.

 그러는 중에 리프기가 있는 대학 병원에서 4주 입원할 수 있었다. 그 기계는 있지만 아들의 운동 시간에 맞추어서 정확하게 이송팀이 와주지는 않았다. 이송팀들이 세팅하는 것을 자세히 봐 두었다. 이송팀이 제 때 오지 않을 경우에는 슬링에 아들을 세팅한 후에 리모컨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아들을 휠체어에 싣고 재활 치료실로 가곤 했었다.


- 조그만 여자분이 그 큰 아들을 기계의 힘을 빌어서 잘도 싣네. 참 대단하십니다.


  병실의 사람들은 덩치 작은 에미가 축 늘어진 청년 아들을 리프트기로 싣고 내리는 것이 신기하다고 말하곤 했었다. 아들의 상태는 조금씩 나아졌다.  게다가 체격이 좋고 요령이 있는 간병사를 만났다. 그분은 혼자서 아들을 싣고 내릴 수 있었다. 6년간 그분이 아들의 전담 간병사를 했다. 그렇지만 그분이 일주일에 한 번씩 쉴 때는 여지없이 그 일은 남편의 몫이었다. 남편은 누가 봐도 샌님 같고 야리야리하다. 처제와 팔씨름을 하면 힘없이 지고 만다. 그 간병사와 팔씨름을 하면 시작하기도 전에 꺾인다.


- 내가 왼손잽이라 오른팔에 힘이 없어서 그래.

[샅바를 세팅한 모습/ 샅바]

  남편은 여자와 팔씨름에 진 이후에는 꼭 변명을 했었다. 남편이 아들의 바지춤을 잡고 안으면 누군가 아들의 다리를 붙들고 호흡을 맞추어서 휠체어에 싣고 내리는 일을 했었다. 재활 요양병원에서 엄지척할 만한 것을 만났다. 바로 '샅바'였다. 어떤 분이 아내를 간병하면서 고안해낸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샅바도 아니다. 그것은 아직 제 이름이 없다. 태권도 벨트를 몇 개 붙여서 허리춤과 두 다리에 걸은 후에 뒤에서 그걸 지탱하여 잡고 환자를 끌어 안으면 들어올리기가 편한 획기적인 효자 제품이다. 지인에게 부탁하여 태권도 벨트를 구했다. 큰 바늘을 사용하여 그 제품을 만들었다. 누군가에는 걸레 조각에 불과하지만 남편과 아들에게는 없어서 안 될 매우 요긴한 보물이다. 두 개를 번갈아가면서 사용하고 있다. 매일 6회 정도는 들고 내려야 하는데 샅바가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남편은 몇 번이나 허리가 나갔을 것이고 통증으로 물리치료실을 다녀야 했을 것이다. 그것을 8년째 사용하고 있지만 짱짱하여 낡지도 않는다.



  

  사소한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그 샅바가 간병 생활에 큰 몫을 해내고 있다.  아들을 간병하는 동안에 고안해낸 아이디어는 샅바 외에도 참 많다. 궁하면 통하는 법이다. 아이디어로운 간병 생활로 그나마 슬기롭게 버티고 있다.

[아들이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는 아들에게 더해진 우리의 시간들 때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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